[근현대사 아카데미 7월후기]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진실, 민간인 학살

By |2014-07-11T01:16:40+00:007월 11th, 2014|서울KYC 뉴스|
마른 장마가 지속되고 있는 뜨거운 7월입니다.

4월부터 매달 실내강의와 현장답사로 진행되고 있는 서울KYC의 근현대사 아카데미!

7월의 실내강의 주제는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 이었습니다.
7월 10일, 무더운 날씨에도 근현대사 아카데미에 함께해주신 분들과 함께
이신철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간단하게 내용 공유 합니다~

작년 한국전쟁이 남침인지 북침인지 학생들이 잘 모른다는 기사가
연이어 나오며 이목을 끌었습니다.
알고보면 학생들이 남침을 남한이 침략당했다고 용어 자체를 잘못 알았을뿐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다는건 확실히 알고 있었죠. 6.25 전쟁 명령을 내린건 김일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원인은 여러가지이고 여러 설들이 있긴 합니다. 단순히 누가 전쟁을 일으켰다 라고 간단히 이야기하긴 어렵습니다. 전쟁은 6월 25일에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그 이전의 남북간의 충돌, 통일 좌절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왜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고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을까요? 주체가 둘이었던 것은 해방 이후 민족독립국가라는 역사정 사명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일본의 지배가 없었다면 남북대치국면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전쟁이 발발했을수도 있습니다. 당시 근대화가 되는 과정에서
계급간 전쟁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계급간 전쟁이 발발했다면
남북이 아닌 동서간 전쟁이었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계급간 전쟁으로 인해 분단된 국가는 없었습니다.

남한에 미군이, 북한에 소련군이 주둔하면서 남쪽에는 민족주의자,
해외 사회주의자들은 평양으로 갔는데 아쉬운 일입니다.
정치세력들이 한곳에 다 모였다면 좋았을것입니다.
1947년이 되어서야 남과 북 지도자들이 모이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분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사람들 사이에서
지도자 모임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전에는 여운형만이 남북을 오가며 좌우 연합, 합작 제안 활동을 했습니다.

1948년 남북 정치지도자들이 모였으나 이미 실질적인 힘이 반도 없었습니다.
이승만은 이미 선거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를 보이콧하고 김구가 북으로 올라가다보니 힘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이 4김회담을 통해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협상을 했습니다.
이북정부의 통일정부 수립은 이승만 정부 타도가 전제였습니다.
하지만 남쪽은 남측 정부를 인정은 못하나
이승만 정부를 정치세력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남북협상에 대해 우파들은 김구와 김규식이 통일정부 수립에 이용 당했다고,
민족주의 입장측에서는 이념의 벽을 넘어서
최초로 남북 지도자간의 만남이다라고 평가합니다.

1950년 5월 김일성이 소련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과
전쟁을 통한 평화통일에 대한 협상을 했고 전쟁시 지원을 약속받았습니다.
전쟁 평화통일은 박헌영과 한두명 이외엔 아무도 모르던 극비사항이었습니다.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났고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는데 단 3일이 걸렸습니다.
국무회의 소집 후 대통령은 "국군이 용감하게 북진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며
먼저 피난길에 올랐고, 국군 역시 무기력했습니다.

전쟁중에 민간인 학살이 왜 일어났나? 이 부분은 참 이해하기 힘듭니다.
일본인 한사람 한사람을 보면 매우 착합니다. 하지만 집단으로보면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인것 같습니다. 친해지면 악한사람이 없죠.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보면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옛날에는 양민학살이라 이야기했고 지금은 민간인 학살이라 하는데요.
양민은 선량한 백성이란 뜻입니다. 선량한 백성은 학살하면 안되고,
악한 사람은 전쟁이니 죽여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렇게 구분을 해서 양민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악한 사람은 사상적으로 이상한 사람, 즉 빨갱이입니다.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는 것이죠.
그렇기때문에 양민학살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학살은 용납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민간인 학살이라 해야합니다.
그렇다면 전쟁중에 잡은 포로는 포로일까요? 국민일까요?
우리는 같은 동족이었지만 서로의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잡힌 사람은 내 국민이라 생각했습니다.
원래 자신의 정부가 다스렸어야 했던 영토라 생각했기에 포로가 아닌거죠. 그래서 전쟁초에는 가서 농사를 지으라며 풀어주기도 했고,
편입시켜 인민군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포로, 적국의 정당한 국민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따르지 않으면 반란자라 여겨 민간인 피해가 컸습니다.
미군에 의한 학살, 인민군 또는 국군 또는 경찰에 의한 학살, 우익청년단에 의한 학살,
미국 사회단체나 소속된 사람들이 학살한 경우 등
민간인 학살은 굉장히 광범위하게 벌어졌습니다.
전쟁 3일후부터 학살 명령이 떨어집니다.
3일만에 서울을 점령당하면서 서대문형무소와 영등포형무소를 처리 못했습니다.
여기에 좌익 사범들이 많았습니다. 인민군들은 형무소 문을 열어
정치범들을 석방했고 석방된 사람들은 방송을 통해 전쟁의 정당성을 이야기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사상범들이 감옥에서 나오면 반란군이 된다고 생각해
후송시킬 시간이 없자 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로 인해 평택 이남 형무소에 있던 좌익 사범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국민보도연맹 사람들의 연행이 이루어졌습니다.
국민보도연맹은 길을 제대로 이끈다는 뜻으로
좌익사상에 물들었던 사람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전향서를 쓰고 가입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 라는 단체였습니다.

지역별 할당이 있었지만, 지역에는 좌파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할당을 채우기 위해 가입하면 작물 씨앗을 먼저 주겠다고 하며 사람을 모았습니다.

전쟁이 나자 국민보도연맹이 반란을 일으킬거라 생각했고, 체포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한자리에서, 3천여명을 총살했습니다.
전쟁이 나자마자 형무소 제소자, 국민보도연맹 가입자에 대한
학살이 대대적으로 벌어졌습니다.
민간인 학살하면 떠오르는 지역 중 하나가 노근리입니다.
미군이 노근리에 왔을때 피난온 사람들이 모두 흰옷을 입고 있었고,
그 안에 (인민군의) 스파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사람들을 붙잡아놓고 수색을 했습니다.
나온것은 없지만 보내주자니 무서워 사흘동안 기관총으로
사람들을 쏘고, 몇명이 다쳤는지 확인하고 다시 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또다른 미군의 학살은 폭격으로 인한 것입니다.
전쟁 초기부터, 전쟁 끝나기 전까지 엄청난 폭격을 합니다.
워낙 폭격이 많아 남아난 건물이 없었습니다.
서울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그랬고
특히 북한지역은 폭격으로 초토화 되었습니다.
원산에 어마어마한 폭탄이 쏟아졌습니다.
원산, 평양 같은 곳은 굴뚝 3개 빼고는 다 무너졌다고 할만큼 많은 폭탄이 쏟아졌습니다.
평양에 살았던 시민이 40여만명이었는데 폭탄은 42만발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시한폭탄, 네이팜탄 등 여러 폭탄으로 인해
복구 자체를 불가능하도록 할만큼의 폭격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이북의 큰 저수지 5개를 동시에 폭격했습니다.
이로 인해 저수지 아래의 마을 18개는 수몰되고,
주위 마을들을 농사 자체를 지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북 민간인 대학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신천대학살입니다.
신천대학살 역시 수천명의 사람들이 학살당한 사건입니다.
처음에는 관련 활동을 했던 간부들을 창고에 가두었고
이후 피난오는 사람들도 전부 창고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다 후퇴가 시작되며 창고에 가둬두었던 사람들을 처리하기 어렵자
불을 지르고 신천 지역에 폭격을 강행했습니다.
신천 지역에서만 3만 5천여명이 학살당했을만큼
많은 피난민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북에서 폭격으로 학살당한 사람이 28만 3천여명입니다.
미군에 의한 폭격 역시 학살로 봅니다.
전쟁이 시작되고 끝나는 그 순간까지 폭격은 계속 되었습니다.

전쟁 당시 대대적으로 부역자에 대한 학살도 이루어졌습니다.
인민군의 무기를 날라주거나, 부녀자들이 밥을 해준 일도
모두 부역자에 포함이 되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부역자 사건이 고양시 금정굴 사건입니다.
다리없는 귀신 종규엄마 이야기가 떠돌아 그 일대를 조사하다보니
수직폐광에 부역자로 몰린 사람들을 몰아넣고 죽인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당시 마을 청년회와 경찰처장이 부역자들을 폐광에 몰아넣고 학살한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유골들도 발견 되었고, 유품 중 분홍색 댕기가 있었는데
이를 본 사람이 자신이 여동생에게 준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51년에는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이 있었습니다.
낙동강 전선에 남아있던 인민군들이 퇴각을 못해
지리산으로 들어갔고, 이들의 식량보급을 어렵게 하기 위해
지리산 인근 마을 사람들을 모두 다른곳으로 이동시켰습니다.
명령받은 군대가 주민들을 초등학교로 이동시킨 뒤
경찰과 공무원 가족, 그리고 그 외 사람들로 두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인민군과 연관이 있다고 누군가가 말하면, 연관있다고 이야기 되어진
사람은 즉결 처분 되었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사람이 지역 의원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를 조사하기 위해 학살이 일어난 곳으로 가니
군인들은 빨치산 옷으로 갈아입고 총격을 하여 결국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외에도 민간인 학살 사건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사건 역시 많습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만들어져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많은 자료들도 모으고, 일부 명예회복이 되기도 했지만
정부가 바뀌면서 자료들은 비밀문서로 지정이 되었고,
여전히 진실은 밝혀지지 않은채 유족의 아픔은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전쟁 당시 일어났습니다.
당시 빨갱이는 절대악이기 때문에 전부 없애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란 이름으로 이러한 일들이 자행되었습니다.
같은 민족, 같은 형제 사이에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는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적개심으로 변했고,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너무 강했던 것일까요? 참 비극적인 일입니다.
과거사의 진실을 밝히고, 과거사 문제를 해결해야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해결해야할 과거사 문제가 많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나라만큼 과거를 해결해나간 나라도 없다고 합니다.
갈길이 멀지만 이루어놓은게 적지 않으니 지치지 말고
앞으로도 진실을 밝히고, 과거사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노력을 함께 해야합니다.



*강의 정리에 도움주신 양승수 선생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