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아카데미 5월 실내강의가 14일에 진행되었습니다.
5월 실내강의는 이신철 선생님과 함께 ‘한국 현대사와 미국’이라는 주제로
한국 현대사에 있어 미국이 어떤 존재였고,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여러가지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올해 3월에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인 웬디 셔먼이 한 세미나에서 한 말이 이슈가 되었던 일.
기억나시나요?
‘위안부 여성’을 이야기하며 (동북아에서) 민족감정이 여전히 이용되고 있으며
정치 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같은 도발은 진전이 아니라 마비를 초래한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외교부 당국자가 한국과 미국이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게 결론이라며
그 진정성을 이해해주며 셔먼 차관을 이해해야 한다며,
셔먼 차관도 우리나라에서 보도되는 방향을 보고 대단히 놀랐다고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부정적인 국내 반응에 조태용 외교부 1차관이
외교부에서 셔먼 차관의 발언에 대해 가볍지 않게 보고 있다며
엄중함을 갖고 이 문제를 다루도록 하겠다며 하루 이틀 사이에 미국측의 입장에 대한
구체적 답이 있을것으로 기대한다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따로 입장을 이야기하진 않았습니다.
5월에는 전 백악관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이자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전략 입안자인
제프리 베이더가 한 세미나에서 아베 총리가 과거 일본이 한 행위에 대해 반성했고
고노 담화도 수용했다며, 개인적으로 아베총리가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했습니다.
왜 미국은 계속 일본에 대해 이러한 발언을 하는것일까요? 무엇을 얻고 싶어서?
미국을 위협하는 중국을 견제하고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선
아시아의 또 다른 강대국인 일본과의 관계 역시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국의 전략에 따라 영향을 받는 우리. 우리에게 미국의 입장은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미국은 현재에도 한국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한국 현대사에 있어 큰 사건에는 대부분 미국이 개입되어 있기도 합니다.
해방 이전의 미국
미국이 처음 우리 현대사에 영향을 미친것은 제너럴셔먼호 사건때입니다.
이후 러일전쟁 시기의 가쓰라·태프트 밀약, 포츠머스 강화 조약을 통해
일본은 한국에 지배적인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고 규정했고,
조선에 온 미국의 선교사들도 일본 지배를 받아들여야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다며
일본의 지배를 인정해야한단 주장들을 했습니다.
해방 공간의 미국
모두 아시다시피, 해방공간에서의 절대자는 미국과 소련이었습니다.
국경에서 관동군과 전투를 벌이던 소련은 비교적 쉽게 국내로 들어왔습니다.
반대로, 미군은 일본본토에서 여전히 전투중이었죠.
미국의 요청으로 소련은 38선 이북인 평양에서 멈춥니다.
만약 이때에 서울까지 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국내외를 포함해 민족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계열의 모든 독립운동 세력이 서울에 모여
새로운 나라만들기에 대한 폭발적인 상상력과 힘이 생겼을지도 모를일입니다.
남과 북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각자의 ‘국가만들기’가 진행되었고,
분단은 일상으로 깊어지게 됩니다.
친일잔재를 청산하고, 토지 무상 배분을 했던 북한과 달리
미군정은 빠르고 쉽게 남한을 점령하고 다스리기 위해 친일세력을 그대로 채용합니다.
식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회주의, 중도 계열 민족지도자들의 활동을 억압하기도 했습니다.
미군정에 결탁하여 생명을 유지하기위해서라도 남한에선 ‘반공’이 맹위를 떨칩니다.
전쟁~1970년대 미국
이 시기는 크게 6.25 남북전쟁과 원조경제 부분에서의 미국을 볼 수 있습니다.
전쟁때는 크게 3.8선 북진의 문제, 남한의 북한통치 거부, 한국의 작전권 이양 문제,
민간인 학살 문제 등이 있습니다.
미국이 큰 영향을 미친것 중 하나가 모스크바 3상회의입니다.
이때 동아일보가 신탁통치에 대해 회의 내용을 정반대로 보도했는데,
(미국은 반대, 소련의 찬성으로 보도를 했으나 실상은 반대였죠)
이에 대해 미국이 더 열심히 해명했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1950년 7월 14일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귀하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에
맥아더의 승인까지 있는 이승만의 서한.
국회의 비준도, 조약이나 협정도 부재했습니다.
전시에는 미국군의 학살이었던 노근리 사건이 있었고
이후에도 주한미군 범죄(파주 나무꾼 사건 등)가 발생했습니다.
SOFA를 체결하고 개정도 했지만 윤금이 사건, 이태원 살인사건,
효순이 미선이 사건 등 재판권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일본은 1995년 오키나와에서 미군 강간사건이 발생했을때
체포하고 구속하는 재판권을 제대로 시행했었습니다.
원조경제와 미국도 살펴봐야 할 부분입니다.
50년대 미국이 한국을 지원해줬는데 이는 민주주이 진작을 위한 원조였습니다.
농촌을 발전시켜야 공산주의를 없앨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회 개조의 일환으로 원조를 했던 것이죠.
5.18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미국에 대한 인식전환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의 첫번째는 공수부대 출동과 미국의 전작권 문제였습니다.
학생들과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공수부대.
공수부대가 출동하기 위해서는 전작권을 가진 미국의 허가가 필요했을거란 이야기였습니다.
두번째는 미군 항공모함이 부산에 입항했던 것입니다.
5월 22일 미항공모함이 부산에 입항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광주 시민들은 열광했습니다. 미군이 도와주러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요.
실제로는 공수부대가 광주로 가면서 비었던 곳을 채우기 위해
미항공모함이 부산으로 갔던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미국이 진짜 우방 국가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서울 미문화원 점거사건 역시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서울 미문화원 점거사건은 동참한 학생들도 많았고 세계 언론이 집중하고 있어
강제진압을 하지 못했습니다. 학생들은 광주에서 있었던 무자비한 진압에 대해
미국에 책임이 있고, 이에 대한 진상 규명을 해야한다고 요구했었죠.
5.18 민주화운동은 현대사에서의 미국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 계기였습니다.
해방 이전부터 해방 시기, 전쟁,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미국은 우리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신철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한국 현대사 속의 미국의 모습과
미국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미국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에 대해 배우고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이신철 선생님께서 이야기해주셨던 5.18 민주화운동, 그리고 미국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해보고 느껴보기 위해 5월 23일(토) 광주 답사를 갑니다.
함께 하실분은 사무국으로 연락주세요.
5월 답사 자세히 보기(http://seoulkyc.or.kr/blog/admin/3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