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을 평화와 인권의 관점으로 해설하는 평화길라잡이 회원들의 조금은 특별한 여행
작년에 이어 올해로 두번째,
지금까지와는 다른 제주!
역사의 진실을 찾아가는 제주4.3 평화여행.
눈물겹게 아름다운 제주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일정 : 11월12일(토)-13일(일) 1박 2일
-1일차 : 4.3평화기념관. 낙선동 4.3성터. 반못굴. 북촌너분숭이 기념관. 순이삼춘비
-2일차 : 큰넓궤. 잃어버린마을(무동이왓). 헛묘. 섯알오름 학살터. 알뜨르비행장. 백조일손지묘.
제주 4.3사건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이 가능할까?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로 사람이 죽었고,
이에 대해 사과와 책임 요구를 묵살!
3월 10일 경찰, 법원, 행정 조직 등 도민의 95%가 참여한 총파업
이때부터 레드아일랜드 ‘빨갱이섬’으로 낙인찍혀 대대적인 구금 검거 작전이 일어난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350명의 무장봉기!
5.10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촉구!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 중지!
무장대는 이렇게 주장하며 경찰지서,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하며 봉기를 시작했다.
5월10일 단독선거! 제주도의 세개 선거구 가운데 두개 선거구에서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되면서,
남한에서 제주도가 유일하게 5.10선거를 거부한 지역이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이승만 대통령은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제주 사태를 인식하고
‘해안선으로부터 5㎞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총살하겠다’는
포고문 발표, 그 후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졌다.
11월 게엄령을 선포하면서 중산간마을에 이른바 ‘초토화작전’을 벌인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약 4개월 동안, 중산간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 학살했다.
해안마을 주민들은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1949년 한라산 더 깊은 곳으로 피신해있던 주민들에게 사면정책을 발표해 산을 내려오게했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또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1954년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무장대와 토벌대사이의 무장충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사건이 마감되었다…
4.3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13,000~30,000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경우도 허다하고, 죽음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것도 여전하다.
왜 이렇게 많은 희생이 있었을까…?
누가 죽었을까..? 어디에서 죽었지…? 왜 죽어야 했을까..?
4.3은 왜 그토록 오랜시간 잠들어있었을까..?
제주는 이 모진 세월을 어떻게 버티고, 견디고 있었을까…?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던 제주.
제대로 울지도 못했던 제주.
어딜가더라도 붉은피로 물들었던 고통스러운 제주
제주가 기억하고 있는 4.3의 현장. 우리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가로세로 500m 크기의 선흘리 낙선동 성터.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폐허가 된 마을을 복원하면서 쌓은 성으로
주민들과 무장대간의 연계를 차단하고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감시. 통제하기 위한 전략촌이다.
이미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었기에 성을 쌓고, 보초를 서는것은 노약자와 여성들의 몫이 되었다.
낙선동성에서 천여명의 사람들이 집단생활을 했다고 한다.
좁은 곳에 수많은 사람을 수용하니 짐승우리같은 곳에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다.
수많은 성터는 모두 허물어지고, 이곳은 최근에 복원되었다.
초소도, 통시(화장실)도, 함바집도 깨끗하게 단장했다. 그래서 살만한 곳인가?
고통스러웠던 현장이 새돌로 다시 만들어져 말끔해졌다. 그래도 아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을이 초토화되자 일부 주민들은 해안마을로 피난했지만,
기르던 가축과 수확한 곡식을 두고갈 수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임시 피난처를 찾았다.
‘며칠만 숨어 있으면 사태가 끝나겠지’하는 생각으로 찾아든 곳이 숲이 우거진 천연동굴이었다.
선흘곶 지역의 반못굴(도틀굴), 주변의 목시물굴, 다랑쉬굴 등등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토벌대를 피해 조마조마 숨죽이며 지내던 동굴들이 여기저기 그대로다.
안덕면 동광리 주민들이 은신 생활을 했던 큰넓궤. 이곳은 영화 ‘지슬’의 촬영지로도 잘 알려졌다.
낮은 자세로 기어서 입구를 들어가면 갑자기 넓고 높은 공간이 나온다. 서서 다닐 수 있을 정도!
청년들은 물론, 노인에서 아이들까지 토벌대를 피해 이곳에서 숨어살아야했다.
토벌대의 습격에 대비해 망을 보기도 하고 식량이나 물을 나르기도 했다.
아직도 동굴에는 항아리 파편 등 당시 생활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짧게는 5일에서 길게는 50일이 넘도록 동굴생활을 했다고한다.
굴이 발각되면 한라산 더 깊은 곳으로 도망을 가기도 했지만,
대부분 총살당하거나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다.
큰넓궤에서 생포된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정방폭포에서 대부분 학살되었다.
길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숲풀을 헤치며, 겨우 도착해야 만날 수 있는 곳.
그 당시는 더욱 울창한 숲으로 아마도 더 찾기가 어려웠을 그런 곳으로 보여진다.
혼자 오면 과연 찾아갈 수 있을까? 걱정될만한 길 아래에 있다.
큰넓궤, 도엣궤가 있는 땅은 이제 사유지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살았던 동굴.
우리는 그 동굴을 온전하게 지켜낼 수 있을까?
이런 역사의 현장이 방치된채 있는 것이 지금의 4.3의 현실인것인가?
순이삼춘의 무대가 된 북촌리 마을.
북촌초등학교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살인. 집단학살.
이곳은 한때 무남촌이라 불릴 정도로 ‘무장대가 될지도 모를 남자들’이 모조리 희생된 곳이다.
평생 순이삼촌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오누이를 잃었던 옴팡밭의 기억.
지금 그 옴팡밭에는 [순이삼촌] 문학비가 세워져있다.
붉은 피로 상장되는 송이 위에 눕혀져 있는 비석들은
당시 쓰러져간 희생자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밤에는 무장대가 출몰하고, 낮에는 순경이 출몰하여
“폭도에 쫓기고 군경에 쫓겨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조천읍 북촌리, 학살과 강요된 침묵, 그리고 울음마저도 죄가 되던 암울한 시대
4.3의 참혹함과 고통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순이삼촌은 이야기하고 있었다.
중산간마을 초토화작전으로,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고 마을은 불타고 모든것이 사라졌다.
동광리에서 가장 큰 마을에 속하는 무동이왓마을도 잃어버린 마을이다.
모든것들이 사라져서, 마을 자체가 무너져서,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무동이왓 주민들은 토벌대를 피해서 큰넓궤로 피신했다.
제주 곳곳에 300여개 정도 ‘잃어버린 마을’이 남아있다고 한다.
사람의 온기는 사라졌지만 방으로, 부엌으로 사용되었던 흔적에 돌탑이 쌓여있다.
마을이 있던 흔적을 알려주는 대나무와 연자방아터, 학살터..
땅은 그대로인데, 이곳에는 더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다.
4.3의 아픔이 그대로 담겨있어 살 수 없는 땅이라서 그런 것인가…
무등이왓에서 가까운 곳에 지슬밭을 지나가다보면 헛묘가 나온다.
헛묘는 가짜묘다. 봉분은 그대로인데, 그 안에 시신이 없다.
정방폭포에서 사살된 사람들. 시신 수습을 하지 못해서,
그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칠성판위에 입던 옷을 넣어서 묘를 세웠다고 한다.
봉분은 7기인데, 9분이 모셔져 있다고 하니 합장묘인 것도 있다.
시신을 못찾아 행방불명된 억울한 죽음. 유가족들의 피맺은 한이 만들어낸 헛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을 체포 구금했다.
제주에서도 4.3때 체포된 사람들, 이른바’불순분자’를 검속한 후
섯알오름에서 집단학살한 사건이 발생한다.
계엄군에 의해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한밤중에 무참히 총살.
이름모를 산야에 암매장되거나 깊은 바다에 수정되었다. 섯알오름은 유일하게 남은 학살터이다.
섯알오름은 일본군이 1944년 말부터 대정읍 ‘알뜨르’ 지역을 군사요새화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폭탄 창고 터였다. 주변에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 시설, 송악산 해안동굴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패망후 미군에 의해 오름이 폭파되면서, 절반이 함몰되어 큰 구덩이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구덩이에서 집단학살이 벌어진다.
전쟁이 끝나고도 유족들이 유골을 수습하지 못하다 7년이 지난 1957년에야 현장을 찾았는데
서로 엉킨 유골을 구분할 수 없어서 함께 모아 묘를 만들어
그 억울한 죽음을 추모할 수 있도록 만든 곳이 백조일손지묘이다.
“조상이 다른 132명이 죽어, 뼈가 엉퀴어 하나되었다 ”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을 구분할 수 없어 합동제사를 지내기 위한 유족들의 마음이었다.
5.16쿠데타 당시에는, 빨갱이를 처단한다는 이유로 묘비가 훼손되기도 했다.
제주4.3사건으로 붉은색이 덧씌워진 제주도민들은
사건 이후에도 냉전과 정치공작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한다.
각종 조작간첩사건이 만들어지고, 연좌제로 인해 고통이 되물림되었다.
군사독재시절 은폐, 왜곡… 강요된 침묵 속에서 4.3의 진실은 드러낼 수 없었다.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통해 조금씩 4.3이 세상과 만나게 되었고
민주화이후 숨죽여온 유가족들의 절규가 알려지면서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국가기념일이 되었다.
그래서, 잃어버린 마을이 돌아오고, 억울한 죽음이 위로가 되었을까?
아직도 여전히 4.3은 진행중이라고 한다.
‘레드컴플렉스’에 시달려온 고통의 시간. 아직도 입밖으로 꺼내는 것이 두려워
4.3의 피해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사람들.
미신고되거나 이름대신 유해번호로 남아있는 미확인 희생자들
국가 예산이 중단되어 유해발굴을 하지 못하는 현장들…
국가가 민간인을 무참하게 학살한 4.3의 진실은 아직도 밝혀지고 있는 중이었다.
감요된 침묵의 시대, 울음도 토해내지 못했던 시대.
군경 토벌대에 학살당한 사람, 무장대에 학살당한 사람….
제주는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과 그들의 유가족들이 얼굴을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날의 기억을 지우고 못하고 있다.
우리는, 제주4.3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 것인가?
도대체 왜 이 비극적인 사건에 4.3이라는 무장봉기 날자를 붙이게 되었을까?
그 날짜에 가려진, 긴긴 고통의 시간들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이 아픔의 치유와 해결을 오로지 제주의 몫으로 남겨둬서는 안될 것이다.
비참한 4.3의 역사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게 무엇이 있을까 고민해본다.
그동안 너무 외롭게 해서 미안한 마음이다.
아름다운 제주 곳곳에 남아있는 4.3의 흔적
제주의 속살을 제대로 보지않고, 제주가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방문했던 4.3유적터에서는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다.
사람이 찾지 않는 곳은 곧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4.3의 흔적이 지워지게 해서는 안되겠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더 자주, 앞으로도 계속 그곳에 가야겠다. 사람들과 함께!
우리는 역사의 ‘진실’을 찾는 것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고,
더이상 국가폭력으로 비참하게, 억울한 죽음이 생기지 않도록
4.3의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려고 한다.
폭도, 산사람들, 무장대, 빨갱이라 불렸을 그들을 제대로 알아주기까지.
제주4.3의 제대로된 이름을 찾는날까지!! 우리들의 여행은 계속 될 것이다.
11월 12일 박근혜퇴진! 백만촛불이 타올랐던 광장에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은
함덕해수욕장에서 우리들만의 ‘함성’으로 달랬습니다.
평화여행에 함께해주신 회원님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