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9월 30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창립

By |2008-09-29T01:57:35+00:009월 29th, 2008|옛 게시판/옛 회원게시판|















1983년 9월 30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창립








































 


















 




1983년 9월 30일 1970년대 학생운동 출신의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창립하였다. 민청련은 “민족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오늘의 현실 상황은, 뿔뿔이 흩어진 민주 청년들이 다시 한데 모여 민중운동의 흐름 속에서 양심적인 지식인·종교인·정치인·노동자·농민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면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새로운 사회 건설에 온몸으로 매진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요지의 발기문을 채택하고, 의장 김근태, 부의장 장영달을 비롯하여 5명의 집행부를 선출하였다.
민청련은 출범과 함께 투쟁성 회복, 청년 내부 역량 체계화, 다른 민주화운동 세력과의 굳건한 연대, 대중운동에의 참여와 지원, 운동방향 모색과 방법 개발을 위한 조사 및 연구 활동을 과제로 설정했다. 1984년 5월 19일에는 광주항쟁 희생자 추도식을 거행했고, 1984년 3월부터는 기관지 <민주화의 길>(1~19호), <민중신문> 등의 간행물을 발행하며, 민중운동의 방향 제시, 정세 분석, 관제 언론에 대한 대항 선전 폭로 등의 활동을 했다.


한편 전두환 정권은 1985년 2·12 총선에서 실패하고, 그해 5월 광주학살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단을 요구하는 학생과 재야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정권은 학생운동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고, 아울러 학생운동과 다른 민주 세력의 연결고리로 민청련을 지목하여 집중적인 탄압을 가했다. 1985년 7월 초 민족민주운동 전체에 대한 전 정권의 탄압 확대 음모에 대해 민청련이 EYC, 전국학생총연합과 함께‘민중민주화운동 탄압 저지를 위한 공동 대책회의’를 구성하고 성명을 발표하자, 이날 회의에 참석했던 김병곤 상임위원장을 구속하고 이범영 집행국장을 수배했다. 민청련에 대한 탄압은‘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관련자들에게 고문을 가하여 민청련을 그 배후로 조작해내면서 본격화되었다.

 














민청련은 1985년 9월 검거 사태 이후 자연히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공간을 상실하게 되어 모든 활동이 위축되었다. 이때부터 1987년 6월민주항쟁까지의 2년 동안 민청련은 전두환 정권의 허위·왜곡·비방 선전에 맞서 자신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한편, 구속 간부들의 석방을 위해 싸웠다. 1985년 9월 28일 민청련 내에 구성된 ‘고문 철폐를 위한 투쟁위원회’는 10월 17일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실제 이 공동대책위원회를 통한 공동투쟁의 경험은 1987년 5월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민청련은 인천 5·3항쟁, ‘2·7 박종철 고문치사 항의 국민대회’, ‘6·10 민주헌법 쟁취 국민대회’등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민청련은 6월항쟁 두 달 후인 1987년 8월 25일 열린 제9차 총회에서 조직의 성격에 대해 소수 선진 청년조직 중심에서 청년 대중조직으로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결의했다. 회원 가입에 대한 문호도 넓히는 한편, 서울 동부, 서울 남부, 성남, 안양 등에 지역조직을 새로이 설치하여 지역 단위로 청년 대중과의 보다 긴밀한 연결 토대를 다졌다. 1988년 9월 17일 제11차 총회에서는 사무직 노동 청년들과 결합하기 위해‘민주화운동 직장청년회 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지역주민운동과의 결합을 위해 주민청년위원회를 발족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1988년 9월 29일에는 민청련 부설로 민족민주운동연구소를 창립하고, 10월에는 지역조직으로 동서울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하였다. 민청련의 지역 조직과 함께 전국에서 청년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89년 1월 19일 전국청년단체대표자협의회(전청대협)가 창립되었다. 1992년 2월 23일 전청대협이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로 개편되면서, 이때 민청련은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