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민청련은 인천 5·3항쟁, ‘2·7 박종철 고문치사 항의 국민대회’, ‘6·10 민주헌법 쟁취 국민대회’등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민청련은 6월항쟁 두 달 후인 1987년 8월 25일 열린 제9차 총회에서 조직의 성격에 대해 소수 선진 청년조직 중심에서 청년 대중조직으로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결의했다. 회원 가입에 대한 문호도 넓히는 한편, 서울 동부, 서울 남부, 성남, 안양 등에 지역조직을 새로이 설치하여 지역 단위로 청년 대중과의 보다 긴밀한 연결 토대를 다졌다. 1988년 9월 17일 제11차 총회에서는 사무직 노동 청년들과 결합하기 위해‘민주화운동 직장청년회 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지역주민운동과의 결합을 위해 주민청년위원회를 발족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1988년 9월 29일에는 민청련 부설로 민족민주운동연구소를 창립하고, 10월에는 지역조직으로 동서울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하였다. 민청련의 지역 조직과 함께 전국에서 청년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89년 1월 19일 전국청년단체대표자협의회(전청대협)가 창립되었다. 1992년 2월 23일 전청대협이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로 개편되면서, 이때 민청련은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