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2008년, 기억해야 할 사람들

By |2008-12-29T16:13:58+00:0012월 29th, 2008|옛 게시판/옛 회원게시판|

[경향포럼]2008년, 기억해야 할 사람들

김민아 | 국제부 부장대우

1985년 유시민이 쓴 ‘항소이유서’에는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내는 부정한 시대”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불행하게도 이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2008년은 공화국의 시민에게 고통스러운 한 해였다. 그나마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평범하지만 용기있는, 그래서 더 아름다운 사람들 덕분이다. 세밑에 ‘조용한 투사’들의 이름을 기억하려 한다.

# 방송법 개악 맞선 앵커 박혜진

“조합원인 저는 이(언론노조 총파업)에 동참해 당분간 뉴스에서 여러분을 뵐 수 없게 됐습니다. 방송법 내용은 물론 제대로 된 토론도 없는 절차에 찬성하기 어렵습니다.” 지난 25일, MBC <뉴스데스크>의 박혜진 앵커는 뉴스를 마치며 이례적인 ‘신상발언’을 했다. 주말에는 거리로 나섰다. 영하의 날씨 속에 유인물을 나눠주며 홍보전을 벌였다. 간판 앵커가 파업에 적극 참여하는 일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1992년 MBC가 ‘공정방송 쟁취’를 위해 파업을 벌였을 때, 손석희 아나운서(현 성신여대 교수)는 구속되고 백지연 아나운서(현 프리랜서 방송인)는 정직 처분을 받았다. 박 앵커도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괘씸죄’를 겁내지 않는, 당차고 총명한 이 여성에게서 희망을 본다.

# 체험학습으로 해임된 설은주

“선생님이 제일 걱정하는 건 너희들이야. 이번 일로 미래와 세상에 대한 희망을 놓치게 될까봐…. 어이없는 사람들도 있지만, 잘못한 게 있으면 뉘우치고 틀린 게 있으면 고치려는 사람들도 많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은주 서울 유현초등학교 교사는 지난 24일 학교 인근의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남다른’ 방학식을 했다. 10월 치러진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일제고사) 때 체험학습을 허락했다는 이유로 해임됐기 때문이다. 설씨는 어린 영혼들이 입었을 상처를 더 염려했다. 길고 험난한 싸움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아이들을 아끼는 마음만으로도 이미 그는 이 싸움의 승리자일지 모른다.

# 대운하 음모 양심선언 김이태

“절대 저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고 제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건기연)의 김이태 연구원이 지난 24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한반도 물길잇기와 4대강 정비계획의 실체는 대운하”라는 글을 지난 5월 다음 토론방 아고라에 올렸다. 건기연은 징계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깨고 일곱달이 지나 ‘3개월 정직’의 중징계를 내렸다. 최근 청와대에서 ‘4대강 정비사업’을 ‘한국판 뉴딜’이라고 명명하며 드라이브를 거는 것과 무관치 않을 터이다. 뒤늦은 징계는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치부만 드러냈다. 양심적 공직자의 입을 막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정부, 그것이 자신들의 실체임을 고백한 것이다.

# 낙하산 사장 거부 투쟁 조승호

“후배들을 앞세운 비정한 선배가 되지 않으려고 함께 나선 것인데, 돌아온 건 해고라는 칼부림이었어요. ‘하늘도 참 무심하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YTN의 조승호 기자는 ‘낙하산 사장’ 거부 투쟁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10월6일 해직됐다. 취재현장에서 만난 그는 진지하고 성실한 기자였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성품은 ‘투사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그가 마이크를 빼앗긴 이유는 무엇인가. 부조리에 대한 합리적 회의와 불의에 대한 정당한 분노 외에는 다른 까닭을 찾기 어렵다. 2009년에는 “YTN 조승호입니다”라는 힘찬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 우리가 잊지 않아야 그는 돌아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