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아카데미 답사후기]인혁열사의 고향 대구를 가다

By |2014-04-30T05:27:10+00:004월 30th, 2014|서울KYC 뉴스|

4월 근현대사 아카데미에서 준비한 답사지역은 ‘대구’입니다.

4월 근현대사 아카데미 답사 : 4월 26일 토요일 오전 8시~오후 9시

해마다 4월이 되면,
1960년 3.15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되어,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면서 시작된 혁명!
4.19혁명을 기억합니다.

혹시, 4월 9일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지금으로부터 39년전 1975년 4월 9일은 사법사상의 암흑의 날로 규정된 날입니다.

75년 4월 8일 2차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놀랍게도! 4월 9일 새벽 바로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이때 돌아가신 8명은 대부분 대구, 경남 출신입니다.
우리가 4월에, 인혁열사의 고향! 대구로 답사를 떠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4월 근현대사 아카데미 첫번째 답사는
해방전후, 대구의 근현대사 역사를 알아보는 시간입니다.

답사 코스
대구 3.1운동길(대구근대 골목길)-4월혁명기념비-진골목-
10월항쟁현장(구 대구 경찰서)-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대구 사무소-
경북대 여정남 공원-칠곡 현대공원 인혁열사 묘역

이번 답사는 인혁열사계승사업회 김찬수선생님과 함께했습니다.

근대로의 대구여행 함께 가실까요?
일제강점기 대구의 변화를 보는 것이 첫번째입니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맘에 백합같은 내 동무야~(대구 출신 박태준 작곡가)
이 노래로 유명한 청라언덕에서 시작합니다.

이 부근은 선교사들의 옛집으로 지금은 선교박물관, 의료박물관입니다.
한식과 양식이 어우러져있으며 1910년대 주택입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교육과 의료를 선교를 위한도구로 활용하여
교회와 병원, 신식학교가 비슷한 시기에 가까운 거리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특히, 약령골목에 자리잡은 제일교회는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집결장소로 활용된 곳입니다.

그 아래쪽으로는 3.1운동길입니다.
독립만세 운동을 준비하는 중요한 비밀통로였다고 합니다.

계산성당을 뒤로하고,
국채보상운동의 주역이었던 서상돈 고택,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외쳤던  민족저항시인 이상화 고택도 둘러봅니다.

주변이 아파트로 둘러싸인 가운데, 가운데 섬처럼 남은 모습이지만
현대의 도시와 근대가 공존하는 풍경이 이색적입니다.
근대의 풍경이 지켜지고 있는게 그나마, 다행입니다.

대구는 ‘약령시’로 불릴 만큼 큰 한약재시장이 열리던 곳으로,
조선후기부터 300년 역사를 이어옵니다.
약전골목 여기저기 한약재 상가들이 가득하고, 적산가옥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다음은 진골목.
진골목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오래된 골목으로, ‘진’은 ‘길다’라는 경상도 사투리.
부자들이 모여살았던 곳입니다.
대구도 읍성도시여서 성을 기준으로 북성로, 동성로 등으로 길이름을 붙이고
“종”이 있던 거리라고 해서 ‘종로’도 있습니다.
‘종로’가 서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명사인 셈이죠.

진골목에 위치한, 코오롱 창업주의 사랑채를 개조한 식당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습니다.
대구 음식은 짜고, 맛없다!라는 고정관념을 깨버린 육국수 입니다.
육계장 국물과 국수를 따로 내와서 말아먹습니다.
와!! 맛있네요. ‘따로국밥’ 스타일의 국수가 끝내줍니다.

대구 중앙로 사거리 4.19혁명기념비
1960년 자유당 정권의 부정 부패 독재에 저항하며 수많은 학생,
시민들이 모였던 4.19혁명의 진원지입니다.
4.19혁명을 이야기하면서 꼭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은, 2.28 대구항쟁입니다.

1960년 2월 28일, 대구 시내 고등학생들에 의해 주도된 한국최초의 반독재 민주화운동!
이후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 의거와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됩니다.
가난과 독재, 불의와 부정에 항거한 대구 시민정신의 표출이었고,
해방과 더불어 수입된 서구 민주주의의 한국판을 구현한 최초의 사건입니다.

2.28항쟁에 이어, 4월혁명에서도 대구의 시민학생 수만명이 모여서
연일 ‘못살겠다 갈아엎자’ 구호를 외치며 민주주의 염원을 분출하며
마침내 이승만 하야와  제1공화국 붕괴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진골목에서 우리는 귀한 분을 만났습니다.
4.19항쟁에 참여하셨고, 오랫동안 교원노조 운동을 해오신 선생님입니다.
민주주의를 꼭 부여잡고,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선생님이 살아오신 삶 자체가 역사이며, 큰 배움입니다.

조선식산은행건물. 지금은 대구 근대박물관으로 사용중입니다.
대구를 대표하는 삼성과 박정희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은 대구 서문시장에서 ‘삼성상회’로 시작을 합니다.
대구 굴지의 사업가로 성장하고 이후 삼성물산, 제일모직 등을 창업하며
삼성그룹의 모태를 마련합니다.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일본군장교가 되었으나
광복후에 국군장교로 복무했다고, 전시에 나옵니다.
대구에서 결혼식을 하고, 신혼생활도 시작했으니..
대구는 박정희의 숨결이 살아숨쉬는 곳이라고 합니다.
박정희를 기억하는 대구의 방식은 좀 아쉽고, 부족한 면이 많아 보입니다.
항쟁의 도시 대구가, 독재자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쉽지는 않겠지만  멈추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여관-여인숙-모텔이 함께있는 오래된 골목을 지나, 대구 항쟁의 진원지를 찾아갑니다.

해방후, 미군정 치하에서 가장 치열했던 항쟁도, 역시 대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45년 해방되던 해는 대풍년을 맞이했던 시기지만, 미군정의 식량정책의 실패와 식량배급 중단,
모리배의 사재기, 특히 대구에서는 호열자의 만연으로 외지와 교통이 중단되어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었습니다.

배고픔에 굶주리다 못한 노동자들이 9월 총파업을 시작하면서,
경찰의 발포로 2명의 노동자가 사망하게되고,
분노한 시민들이 결합하며 민중항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기아데모(부녀자들이 쌀을 달라고하는 시위)가 열리고 노동자들이 결합하고
경찰과 대치하며 십수명이 사살당하게 됩니다.  

중고등학생들까지 총궐기하여 시민들이 대구 경찰서를 포위하고 경찰을 무장해체 시킵니다.
친일경찰과 친일지주 및 고리채부자들의 집을 습격하고 해방구가 되지만
다음날 미군이 대구경찰서를 접수하면서 종료되었습니다.

항쟁 과정에서 살해된 민간인 수는 죽인 사람도 말하지않고
죽은 사람들의 유가족도 말하지못해 정확한 집계가 없습니다.
10월항쟁은 ‘쌀과 자유의 공동체’를 꿈꿨던 사람들이
미군정과 그들의 후원을 받은 보수적 친일반동 세력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무릎쓰고 일어선 시민들의 용기는
이후 제주 4.3항쟁과 여순사건으로 이어져갑니다.

박정희 정권 초기였던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1974년 2차 인혁당사건, 1975년 4월 8일 사형선고, 4월 9일 사형집행.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은 한일회담으로 야기된 6.3투쟁을 무마하기위해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입니다.
공안검사들이 증거불충분으로 기소를 거부할지경에까지 이르렀고, 흐지부지 끝납니다.

1974년 벌어진 2차 인혁당 사건은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사건으로 학생운동 지도부를 체포기소하고
그들의 배후에 북한 지령을 받아 남한에서 공산혁명을 일으켜 현정부를 타도하려는 지하조직
즉, 인혁당재건위원회(2차 인혁당)라 하며 고문수사를 진행했습니다

1974년 ‘내란예비 음모 및 내란 선동’이라는 엄청난 협의로 기소되어
1심에서 사형 8명, 무기징역 7명, 15년 이상 징역이 8명 등 모두 중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대법원은 75년 4월 8일 1심 확정판결을 내리고,
놀랍게도 다음날 새벽,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이날의 사형집행은 조작의 전모가 밝혀지길 두려워한
박정희 정권에 의한 폭거였고,
우리 역사에 씻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비극이 되고 말았습니다.

레드컴플렉스를 이용하여 대항세력을 탄압한 것은
박정희 정권 시기 무수히 벌어진 간첩조작사건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특히, 2차 인혁당 사건에서는 단순한 정권대항세력을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뿌리채 뽑아 없애려는 잔혹한 면을 보여줍니다.

사형이 집행된 다음 긴급조치 9호가 발표되고, 이것은 유신시대 최악의 법이었고
유신에 반대한다는 말만 꺼내도 잡아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해방후 10월 항쟁, 2.28항쟁, 4.19혁명을 거치면서
대구는 민주주의,진보 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지도부를 비롯하여 많은 시민들이 결합하여 큰 힘을 보여주곤 했습니다.
인혁당 사건의 주요 피해자들이 대구, 경남지역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형당한 8명 중 가장 어린나이였던(당시 30세) 여정남 선생님은
경북대학교 내에 추모 공원과 추모비를 설립해서 그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경북대에 이 추모비가 들어서기까지, 정치적 압력도 존재하면서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1974년 이후, 인혁당 열사들이 남긴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도 없었고,
공판조서와 유언까지 조작되어 유족들에게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1989년 이후 인혁당에 대한 재평가와 추모제가 최초로 열렸으나
여전히 ‘인혁당’과 관련된 모든 것은 이적표현물이 되곤했습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하면서
중앙정보부에 의한 고문, 이를 통한 증거조작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법원에서 재심을 개시하여 2007년 32년만에 무죄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칠곡. 현대묘역에는 인혁통일열사 네분이 잠들어계십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들은 할말이 없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2011년 인혁당 사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배상금 이자 발생시점을 원심과 다르게 판단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즉, 인혁당사건에 대한 국가배상금이 과잉지급되었다고 판단하고
무죄선고 된 시점으로부터 지급하라는 것입니다.
정부에서는 과잉지급된 이자를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국가기관의 고문과 조작에 의한 사건이었고, 사형이 집행되었고,
유가족들은 삼십여년이 넘는동안 사회적 차별과 냉대속에, 숨죽이며 살아왔습니다.
국가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사죄하는 의미인 ‘배상금’을 가지고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큰 상처를 주고 있는겁니다.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위로해주지 못하는 사회, 그게  우리 현실입니다.



답사를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온 시대, 이미 지나온 과거를 제대로 배우고,
숨겨지고 가려진 역사의 진실을 알기위함입니다.
그리고 2014년 오늘을 살아가면서,
그 진실을 제대로 기억하고,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게하기 위함입니다.

수구.보수의 본고장이라 불리우는 대구.
해방전후, 독재정권 시기까지
자유와 민주주의를 염원했던 가장 뜨겁고 진보적인 도시이기도 했던 대구.
근현대사의 아픈 경험. 치유되지 못한 기억이
지금의 ‘보수적인 대구’를 만든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편안하게 잠들지 못하는 인혁통일열사!
국가가 저지른 폭력과 범죄에 의해 희생되신 분들.
해마다 4월이 되면, 그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잊지않고 다시 찾아올 수 있는 날을 기약합니다.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김용원
이수병
여정남

1975년 4월 9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8명의 인혁열사를 기억합니다.
1차, 2차 인혁당관련 국가 범죄의 피해자 여러분을 기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민간단체로, 4월에 인혁열사를 찾아온 것은 우리가 처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정성껏 답사 준비도 해주시고, 긴 시간에 걸쳐
대구 근현대사를 배울 수 있게 해주신 인혁열사계승사업회 김찬수 선생님께 감사 인사 전합니다.

-서울KYC 회원이 왔다고! 서프라이즈 나타나주신 전 KYC공동대표 주선국 대표님!
육국수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여정남 추모공원 건립을 위한 학교 당국과 소통창구로써 많은 역할해주신거.
잊지 않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서울KYC 근현대사 아카데미 4월 답사에 함께해주신 분들!!
진지하게 보고, 듣고, 맛있게 잘먹고,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진촬영에 도움주신 양승수, 조인숙님 고맙습니다.

>> 4월 근현대사 아카데미 1강 후기 [우리 역사에 나타난 인권. 이이화 선생님]
http://seoulkyc.or.kr/blog/admin/3222

>> 5월 근현대사 아카데미 일정은 아래를 참조해주세요
-실내강의 : 5월 15일(목) 1980년 5월 광주/ 이신철(성균관대 연구교수, 천재교육 교과서 공저)
-현장답사 : 5월 17일(토) 광주 현장답사/ 오전 7시 40분 서울역 출발(해설 : 5.18재단 오월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