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기다리셨나요? 박수민 인턴입니다.
이번엔 창덕궁 옆에 위치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 다녀왔습니다.
3층에 있는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상당한 규모와 많은 책들에 압도당했습 니다.
저희가 만난 염형국 변호사님은 공감을 처음 만드신 분으로 소탈하게 저희의 인터뷰에 응대해주셨는데요.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공감>은 적은 인원으로 입법운동, 소송지원, 제도개선 연구 등 다양한 일을 하고 있는데요. 일이 많이 바쁠 것 같은데, 공익변호사의 하루 일과는 어떻게 진행되는가요?
저희는 지금 변호사 7명, 간사가 2명이 상근으로 일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각자 맡은 영역이 있거든요. 저 같은 경우는 장애인 영역이고 다른 분들은 난민, 빈곤문제나 성소수자 취약노동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그 관련단체들이 많이 있거든요. 그 단체들과 많이 일을 해요. 상담을 하기도 하고 보통 소송 혹은 입법개정활동도 있고 이런 다양한 일들이 있는데 .누가 이거 하라 하는 게 아니고 각자 스케줄을 짜서 자율적으로 일을 하는 시스템이에요. 그래서 월요일마다 전체적으로 논의하고 정리하는 회의를 하고 나머지요일에는 각자 알아서 하는 거라 일과가 각자 달라요. 그리고 그때그때 급한 사안이 있으면 같이 모여서 해결하기도 하고 그렇죠.
-그러면 사건은 주로 어떻게 들어오나요?
주로는 단체를 통해 들어오고 아니면 홈페이지에 함께하는 공익소송 신청을 해서 오시기도 해요. 또 보통 외부에서 토론회, 공청회 이런 걸 하게 되면 그걸 통해 프로젝트를 하거나 할 일거리가 생기게 되는 거죠.
<공감>이 최근 아름다운 재단에서 독립하였다고 들었는데 독립을 한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공지를 하기도 했는데 아름다운 재단에는 만 9년 동안 있었고요. 아름다운 재단이라는 곳은 대중상대로 모금을 해서 배분을 하는 기관이고 공감은 법률지원을 하는 기관이잖아요. 성격이 너무 다르고,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인큐베이팅을 전제로 출발을 했었어요. 그래서 저희가 재정적으로 안정이 되면 독립을 하는 것으로 했는데 9년 만에 하게 된 거니까 조금 시기가 늦어진 거예요. 일단 그게 제일 큰 이유이고요.
그리고 독립을 통해 좀 더 공감의 외연을 넓힌다고 할까요. 공감이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일들을 할 수 있는 것도 대표적인 이유인데요. 대표적으로 로스쿨제도도 도입이 되서 그런 후배들 중에 공익변호사 길을 도전하려는 친구들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처음에 재정지원을 받아야만 시작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여건이 현재 갖추어져 있지 않고요. 그런 것을 공감이 담당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아요.
또 공감사업을 좀 더 체계화시키기 위해서는 국제인권분야에 센터를 만들고 또 공익법교육분야도 센터를 만들어야 하는데 사실 그게 아름다운재단 내에서는 가능하지 않거든요.
-법적인 문제 때문에 만들 수 없는 건가요?
아, 아름다운 재단 내의 한 팀이 재단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모순인 거예요. 그래서 나오게 된 겁니다.
-사회적 약자에게 법률적 지원이 특히 필요한 까닭이 무엇인가요? 국가에도 그런 사람들을 위한 법률 구조제도가 있고, 자기가 억울하게 당한 거면 스스로 소송을 해서 승소하면 될 것 같아서요.
제가 질문의 취지를 정확히 이해한 건지 모르겠는데 일단 이런 분들은 돈이 없으니 변호사를 선임할 수가 없죠. 사실 법률 서비스가 굉장히 고가잖아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이용하기에는 너무 문턱이 높죠. 그런 사람들을 위해 법률구조공단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국가에서 하는 서비스가 다 그렇지는 않지만 법률구조 같은 경우에는 충분히 재정지원이 되지 않고 변호사도 각 사무실마다 한명, 많으면 두 명밖에 없어요. 가서도 상담도 변호사에게 받지를 못해요. 또 이제 워낙 많은 사건을 의뢰를 받다보니 개개인에 대해서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죠.
공감도 돈이 없다고 다 지원하기는 어렵고, 그 중에서도 사회적 약자의 지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을 다루죠. 가령 장애인이라서 차별을 받고 또는 성소수자여서 인권침해를 받는 분들에 대해 지원하고 있어요. 그래서 공감이 하는 역할도 제한적이죠.
그럼에도 사각지대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그건 사실 좀 더 국가가 법률구조를 확대를 해야 할 부분이고 그래서 조금씩 개선이 되고는 있어요. 지방자치단체마다 변호사를 뽑아서 민원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올해부터 하고 있고 조금씩 국선변호사도 확대가 되고 있죠.
그렇지만 뭐 혼자서 소송을 하기는 대학생들도 어려운데 법대생이라도 법을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소송을 혼자하기에는 어려운 거죠. 지금 현재 60퍼센트 이상은 나홀로 소송은 하고 있기는 해요. 그런 분들이 법률적 지원을 받으면 패소할 사건을 승소하거나 자기주장을 더 제대로 할 수 있었겠죠.
-공감은 2003년 12월부터 시작해서 나름대로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이렇게 꾸준히 잘 운영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요?
공감은 제가 처음시작을 했잖아요. 처음 시작한 사람의 프리미엄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우리 사회가 일등만을 기억하잖아요(웃음). 그렇게 공감이 처음이자 유일한 공익변호사단체로 7~8년을 그렇게 보냈었죠. 우리랑 경쟁하는 사람이 없어서 언론에서도 공감이 무슨 일을 하면 조명을 해주시고 공감 자체만 취재한 것도 수십 번은 되거든요. 그래서 그런 것이 가장 중요한 근거였던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공감이 처음에 단독으로 시작했으면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아름다운 재단이라는 사회적으로 너무나 잘 알려지고 좋은 곳을 근거로 삼아 출발을 했죠. 그것도 공감이 많이 알려지는데 기여를 한 것 같습니다.
-너무 겸손하신 거 아닌가요. 변호사 개인의 역량도 반영되었을 것 같습니다.
뭐, 그런 부분이 아예 없지는 않았고 우리는 선례가 없었으니 처음에 4명이서 시작을 했는데 초기엔 난관에 많이 부딪치기도 했었죠. 그렇지만 우리랑 함께 일하는 단체들에서도 그런 현실적인 필요성이 굉장히 많았고 거기에 우리가 부응을 해서 시너지 효과를 많이 가져왔던 것 같아요. 그것을 사회에서 인정을 해주면서 기부도 우리가 노력을 하는 것에 비해 조금 더 수월하게 받게 된 것 같아요.
-그럼 대표로서 단체의 존립과 관련해서 위험한 순간은 없으셨나요?
저는 그런 순간이 없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주변에서 몇 년 갈 수 있을지 걱정하는 선배 법조인들도 있고 그랬었는데 우리 내부에서 존립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오히려 얼마나 잘 안정화되고 좀 더 효율적으로 법률지원을 할지에 대해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제가 개인 기부를 좀 더 중점으로 모금을 하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초창기에는 로펌 혹은 기업에서 지원을 많이 해주셨고요. 그런 것들이 또 큰 힘이 되었죠.
-지금 현재 <공감>은 재정운영이 기부금으로 이루어지는 건가요?
네. 저희는 100% 기부금으로 이루어지고 있고요. 정부 지원도 받지 않고 있어요. 우리는 정부 특히 복지부나 법무부 상대로 요청하는 게 많잖아요. 복지부를 상대로는 인권문제와 관련한 복지를 늘리라고 주문하죠. 법무부를 상대로는 출입국 문제, 피의자 구속 문제와 관련된 요구들을 하죠. 그렇게 정부를 상대로 싸우면서 돈을 받는 게 모순이잖아요. 그래서 정부지원은 받지 않고 독립해서 활동을 하고 있고 백퍼센트 기부를 받아서 기부자님들의 기부에 힘입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박원순 현시장님을 찾아가서 단체를 만들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렇게 <공감>을 만들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으신가요?
특별한 계기는 없었어요. 공감을 처음에 만들겠다고 생각한 건 전혀 아니었고 그때는 그냥 이런 공익적 일을 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처음에 그때가 2003년도였는데 참여연대만 변호사가 한 분이 상근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또 공익변호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대단히 적었고 그래서 그런 일을 하면 좋겠다고 마음을 먹고 참여연대 찾아가보니 거기서는 더 이상 변호사를 고용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마음을 접고 있었는데 그때 박원순 현시장님이 매년 사법연수원에 특강을 하러 오시던 때였어요. 그 특강에서 NGO에서 일을 하면 정말로 보람 있고 사회에 공헌도 할 수 있고 경쟁자도 없어서 블루오션이라고 말씀해주시면서 그 길을 권유하신 거죠. 그래서 그때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 학창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셨나요?
저는 전혀 학생운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공감의 다른 변호사들도 그런 활동을 해오신 분은 거의 없죠. 다만, 주류에 잘 속하지 못하고 좀 아웃사이더인 분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웃음).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는 막연히 변호사가 되서 사회에 좀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어릴 땐 어떻게 살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죠.
-저희 같은 20대 대학생이 참여 할 수 있는 <공감>의 프로그램이 있나요? 대학생 인턴쉽과 인권법캠프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소개 부탁드릴게요.
작년부터 (캠프는) 두 가지로 운영을 하고 있는데 겨울에 하는 캠프는 예비법조인, 연수원에 들어가거나 로스쿨에 입학할 학생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거고요. 여름에 하는 캠프는 사실 대학생이라는 제한도 없고 그냥 일반인 대상으로 공익법에 관심 있는 사람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작년부터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캠프에서는 다양한 인권관련 주제들을 외부 인사들을 섭외해서 전체특강을 하기도 하고 실제 인권 체험하는 활동을 해보기도 합니다.
또 인턴쉽같은 경우는 벌써 16기를 하고 있는데, 매년 3월과 8월에 시작을 하고 그래서 지금이 모집시기에요. 곧 서류와 면접을 봐서 최종선발을 하게 되는 데요. 뭐 많은 경우에 로스쿨 지망생들이 많이 오지만 그런 제한은 전혀 없고 국내분야, 해외리서치분야, 홍보나 운영분야 이렇게 4분야로 나눠서 20명 정도 선발을 해요. 이제 공감을 거쳐 간 자원활동가만 해도 상당수가 될 정도에요.
-여기는 다른 단체처럼 허리활동가가 없거나 인력난을 겪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실은 고민의 지점이 다른 것 같은데 공감은 사실 공간도 지금 빽빽하잖아요.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체험의 기회를 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인 여건이 갖춰지지 않아서 원하는 분들은 계속 많이 있는데 체험을 계속 시켜줄 수 없는 게 고민입니다.
또 다른 고민 중에 하나는 다른 단체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공익적인 마인드를 갖추고 그걸 쌓을 수 있는 공간이 갖춰져야 하는데 그런 것들은 시민단체의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인턴쉽도 잘 못하고 그런 부분들이 안타까워요. 그런 인턴쉽이나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공익단체에 관심 있는 인력들도 많아지고 채용에 있어서의 어려움도 많이 해결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익단체들이 그런 부분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그럼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있나요?
최근에 결과는 좋지 않았는데 군대에서는 사격훈련을 하잖아요. 그것 때문에 귀가 멍해지는 느낌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서 끝나는데 일부사람들은 그게 평생이 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걸 ‘이명’이라고 하는데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군대 이명피해자들이 대단히 많거든요. 근데 이명환자의 98프로 이상은 군대에서 사격훈련을 하다가 피해를 당했는데 국가에서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아요. 이명은 치료가 되지도 않거든요. 그래서 최소한의 예우, 피해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우리나라가 아직 그런 사람들에 대한 보상이 미치지 않는 측면도 있는데 좀 더 그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고 그것이 정책에 반영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분들을 대리해서 국가유공자로 인정을 해달라는 소송을 내기도 하고 또 그 법률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송을 내기도했는데 그런 것들이 다 기각이 됐어요. 좀 안타까운데 소송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제도가 바뀌기는 했어요. 그래도 소송을 한 분은 양말공장을 하시면서도 국가에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방치하니까 억울해서 계속 그런 활동을 하시는 거예요. 이제 공감에서는 더이상 소송건을 도와드리기는 어렵지만 계속 그런 활동을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는 꼭 승소를 하거나 사회에서 인정받는 다고해서 그것이 의미 있는 소송이거나 활동이 아니라, 목소리를 사회에 내고 싶지만 사회에서 아무도 그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함께 내주는 것도 대단히 의미있다고 생각을 하고 공감도 앞으로 좀 더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한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공감>이 독립하여 나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요. 이런 <공감>의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생각인지 듣고 싶습니다.
아까 독립이야기로 조금 설명을 드렸는데요. 그런 후배공익변호사 양성부분에 있어서 역할을 할 책임감이 좀 있고요. 그래서 재정지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하려고 하고 재정 지원말고도 다양한 지원들이 필요한데 그런 장비나 네트워크나 다양한 지원방안들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어요.
다른 한쪽으로는 센터에서 정보를 모으고 외부인사와 결합해서 그 분야를 확산시켜나가는 것인데, 국제인권분야가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할까요. 그래서 그런 것을 국제인권센터를 만들어서 사회에 중요성을 확산시켜 나가는 게 있고요. 또 로펌의 프로보노(‘공익을 위하여’라는 뜻의 라틴어 ‘pro bono publico’의 줄임말) 확산을 위해서 프로보노 교육중개센터도 건립계획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공감자체에서도 공감이 하는 영역의 깊이를 좀 더 확대시키고 공익단체들과 연대를 좀 더 강화시키는 것이 앞으로 공감이 나아갈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공감에서는 법률가의 기득권을 버리고 사회를 위해 일하고 계신데요. 요즘 스펙 쌓기에 몰두하는 20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우리사회에 멘토들이 넘쳐나잖아요. 저는 그들처럼 어떻게 해라라고 말하기 보다는 어쨌든 좀 더 스스로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그게 사회에서 인정을 받든 받지 못하든 스스로 즐거운 일을 찾아서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스스로 여유가 생기면 남을 바라볼 수 있잖아요. 개인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존재하는데 사실 이기심이 삶의 원천인 것 같아요. 이기심은 분명히 인간의 본심인데 그게 어느 정도 채워져야 이타심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궁극의 행복은 모두가 이기적일 때가 아니라 이타심을 가지고 서로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많아질 때 만들어질 수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사회가 이렇게 좀 더 끈끈해지기 위해서는 20대 여러분이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자신이 스스로 즐거워할만한 소소한 행복을 찾아가는 것에 있다고 봅니다.
인터뷰후기
디케는 정의의 여신이다. 그의 눈은 덮개로 가려져 있다. 아마 불필요한 것을 보지 않고 공정한 판결을 내리려는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앞을 보지 않고는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애석하게도 법의 현실은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률서비스는 장벽이 높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돈이 없으면 그냥 참아야하는 경우가 많다. 법의 이념은 평등하나, 그 현실은 불평등하다. 따라서 디케는 안대를 벗어야 한다. 정의는 그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현실을 직시할 때만 실현될 수 있다.
변호사는 기득권 집단이다. 전문직에다 소득도 많다. 염형국 변호사는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사법연수원을 졸업하자마자 공익법률활동을 시작했다. 주변에 공익활동을 하는 사람도 없어서, 무턱대고 박원순 변호사를 찾아갔다. 공감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주변에서는 우려도 많았다고 한다. 아직 공익변호사 단체가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감은 10년 가까이 꾸준히 활동하면서, 법률서비스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도와왔다. 염형국 변호사는 인터뷰 말미에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말했다. 사람인(人)자는 두 사람이 마주하고 있는 것이라 설명했다. 뉴스에서는 비리나 부정을 저지른 법률가들이 나오곤 한다. 그럴 때는 법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조금만 돌아보면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쓰는 법률가들도 많다. 그런 사람들 덕분에 디케의 안대는 서서히 벗겨지고 있다. (박형호 인턴의 후기)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본 ‘법에도 꽃이 필 수 있을까’라는 구절이 오랫동안 머리속에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