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인터뷰4] 평화길라잡이대표 ‘이재정’활동가를 만나고 오다

By |2013-02-07T06:37:24+00:002월 7th, 2013|서울KYC 뉴스|

회원인터뷰도 벌써 네 번째인데요.
저 박수민 인턴과 박형호 인턴이 이번엔
일산 고양시까지 회원님을 뵈러 달려가 보았습니다.
경기장애인인권포럼와 한 사무실은 쓰고 있는 고양시민사회연대회의에서 활동하고 계신
이재정회원님의 즐거운 안내 같던 인터뷰를 담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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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길라잡이를 하시게 된 이유는?
 제가 원래 2008년에 촛불 집회에 열심히 나갔는데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집회가 사그러 들었잖아요. 그러던 중에 교과서 가지고 말이 되게 많았어요. 큰 핵심은 일제 시대에 일제가 우리를 근대화시켜주었다는 얘기와 건국절 논란이었어요. 건국절 논란은 우리가 8․15를 기억해야 되는데 해방된 8․15가 아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8․15를 기억해야 한다는 거였죠. 그걸 듣고 저는 좀 충격을 받았어요. 일본이 근대화를 시켜줬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잖아요. 물질적으로만 경제지표상으로 늘었으니까 근대화가 되었다.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 논리로 따지면 조선도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웠을 때보다는 고종 때 훨씬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죠. 그렇다고 이씨 조선을 무조건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역사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건국절이 중요하다는 건 어떤 주장이냐면 광복했을 때의 8‧15보다는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의 8․15를 기념하자는 거죠. 그것은 통일은 생각하지 않고, 남한만의 역사를 추구하겠다는 것이거든요. 그 때 좀 ‘이러면 안된다‘ 위기의식을 느꼈어요.
 그러던 중에 어디서 평화길라잡이 모집을 하더라고요. 평화길라잡이보다 처음에는 강사진을 봤는데 강사진이 정말 훌륭해서 아 이 강의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원래 그때는 2종류의 강의가 있었는데 하나는 평화길라잡이 강의고 또 하나는 역사교육강의였어요. 근데 평화길라잡이는 그걸 들으면 안내를 해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때는 안내할 생각은 없었고 강의료가 싸서 아, 이 강의만 들어야겠다고 처음에는 신청했어요.

-강사진이 정말 좋았나 봐요?
 네. 교과서를 검정하는 위원회에 계신 분들이 나오셔서 아 이거 한번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교과서 문제에 대해 불만도 많았고 이렇게 해선 안된다고 느꼈죠. 누군가 시민단체가 이게 아니라고 말을 해주고 교육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KYC가 그걸 하더라고요. 그래서 평화길라잡이에 첨부터 관심이 있었다기보다 강의료도 싸고 해서 들은 게 컸죠. 저는 그때 5~7만원정도를 냈는데 30명 수강정원에 강사가 15명, 그것도 강사가 교수급이었죠. 그때 되게 저는 이런 시민단체도 있구나 하고 놀랐죠. 보통 시민단체들은 그런 현안이 생기면 유명한 사람들 불러서 한두 번 강의를 하고 말아요. 근데 여기는 그런 강의들을 들은 사람들을 모아서 또 하나의 프로그램을 만들더라고요. 아, 그래서 ‘먹튀‘(’먹고 튀기’의 줄임말)를 하면 안되겠다. 이렇게 좋은 강의를 들었으니 내가 활동을 해야 되겠구나 해서. 강의를 다 듣고 길라잡이 안내를 하게 되었죠. 처음 시작한 계기는 평화보다 역사, 민주주의에 관심이 많아서 지원을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안내를 직접 해보니 어떻던가요?
 다들 아시겠지만 안내가 굉장히 떨려요. 보통 교수님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니까  교수의 의견이 맞든 틀리든 다 듣잖아요. 그런데 저희가 안내하는 건 제가 직접 모집을 해야 됐어요. 저희가 그때 일요일 1시 3시에 안내를 했던 것 같은데 직접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는 게 되게 힘들더라고요. 더 문제는 제가 안내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잘할 수 있을까. 또 하나는 제가 얘기를 하는데 왜 편향된 얘기를 하지? 하고 태클을 걸까봐 그게 가장 초창기 안내를 하면서 부담되고 걱정됐던 거였어요.

-특히 이 평화길라잡이가 태클이 많이 들어온다고 들었어요. 회원님도 그런 일이 있으셨나요?
 실제로 태클을 받은 건 특별히 많지는 않은데 우리 스스로 자체검열을 해서 그런 듯해요. 다른 KYC의 궁궐, 도성길라잡이활동은 문화재에 초점을 두고 하잖아요. 근데 저희는 그런 문화재에 대한 내용 전달보다 가치를 전달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가치에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저랑 생각이 다른 사람이 들었을 때도 불편해하지 않게 안내를 해야 된다는 부담감이 있죠. 그래서 마음속에 항상 쌓아두고 다 얘기를 못하는 거예요. 서대문형무소의 역사를 보면 1908년에 만들어져서 1987년까지 80년간 썼는데 일제 시대보다 해방되고 사실 더 오래 썼어요. 근데 서대문형무소는 독립운동의 성지로만 알려져 있잖아요. 거기서 유관순 열사가 어떻게 처참하게 죽고 그런 것만 기억을 하지요. 근데 사실 현대사속에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거기서 죽어갔는데 그런 건 제대로 조명이 안됐죠.
 그리고 사회주의계열의 독립 운동가들도 많은데 그분들도 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헌신을 한 분들인데 역사 속에서 제대로 기억되지 못하고 있어요. 근데 저는 그 사람들을 일부러 기억에서 배제시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분들을 독립운동가로 기억을 하되 북한에 가서 한 추후의 일들은 따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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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라잡이활동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관람객은?
 제 안내타임이 아닌데 안내를 하게 된 경우가 있었는데 아주머니 3분이 있으시더라고요. 근데 보통은 그런 분들은 안내를 잘 안듣고 학생들이나 초등학생을 키우는 어머니들이 교육을 위해 들으세요. 아주머니 3분이 들으실 것 같지는 않은데 왔으니 목표는 채워야 되니까 안내를 들을 건지 물어봤죠. 근데 듣는다고 하시고 되게 잘 들어주시는 거예요. 그때가 인혁당 추모전시회를 할 때였는데 그 전시회 주변을 지나는데 관계자분이 아주머니들에게 인사를 하는 거예요. 이상해서 물어보니 전태일 어머니 아시죠? 이소선 여사와 같이 서대문 형무소에 오셨던 분들인 거예요. 그래서 그 뒤로 긴장이 엄청 많이 됐죠.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해야 될까요. 저는 감옥도 한 번도 안가보고 고생도 안해봤는데 정말 고생하신 분들 앞에서 안내를 해야 되니까 많이 떨렸죠.  정말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크니까요. 그래도 지금 그게 제일 기억에 남네요.

-그럼 가장 보람된 순간이 있을까요?
 보람이라기보다는 최근에 선거에서 지고 나서 되게 힘들었어요. 다른 게 아니고 지금도 그렇지만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왜 졌을까. 물론 저는 그 당시에는 평범한 시민으로 직장에 다니고 있었거든요. 근데 저희가 하는 일이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기 위해서 시민들을 교육하는 거거든요. 이런 우리의 자그마한 노력이 모여서 뭔가 세상이 변화됐으면 하는데 또 거꾸로 간다는 생각이 드니까 절망했죠. 근데 선거가 끝나고 한 2주 뒤가 제 안내였는데 안내가기가 너무 싫더라고요. 어쨌든 안내를 갔는데 처음에 엄마하나 아들 딸 하나를 하다가 사람이 좀 더 모여서 10여명을 안내하는데 처음에는 힘없게 하다가 어느 순간 제가 힘있게 안내를 하더라고요. 안내를 하고 나서 생각을 해봤어요. 제가 여기 안내를 하는 건은 뭔가 바꾸기 위해서 하는 것도 있을지 모르지만 정말 나 자신을 위해서 안내하는 구나. 이 안내를 통해 제가 힘을 받을 수 있구나. 이게 최근일이긴 한데 되게 좋았고 다시 힘을 얻을 수 있게 해준 것 같아요.

-안내하시면서 어떤 힘을 받은 건가요?
 이걸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는데 저는 역사라고 하는 것을 어쨌든 이런 일을 하기 때문에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역사공부를 하잖아요. 우리나라가 굉장히 어렵게 살긴 했지만 3․1운동 , 4․19같은 것을 보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많이 움직였을 때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배웠어요. 당장은 힘들어도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의식을 깨고 한발 한발 나아가면 세상이 발전하는구나. 그래서 이 사람들이 반응을 보이고 또 내가 이분들에게 뭔가 해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보람된 게 아닌가. 그런 걸 느꼈죠. 3.1운동 같은 경우도 제가 안내할 때 설명을 하지만 평범한 운동이 아니에요. 우리가 한 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것 밖에 없어요. 그런데 대한독립이 그렇게 만세를 외친다고 성취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외쳤고 그것을 기반으로 상해임시정부가 수립할 때 헌법에 이 나라의 주인은 ‘국왕이 아닌 국민’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들어갔어요. 봉건제가 1910년에 끝났잖아요.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 나라를 세웠는데 사람들을 많이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명망성이 높은 사람, 그 때 당시로 하면 순종을 영입하면 누구도 반대할 사람이 없잖아요. 그런데도 임정이 그렇게 국민을 내세운 건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힘을 느낀 거죠. 그걸 기반으로 정부를 수립하고 그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독립운동을 해야할 지 체계적으로 고민한 것 같아요.
 
 또 현대사에서도 우리가 분단되고 전쟁을 많이 겪었지만 전쟁을 겪고 나서 10년 뒤에 4,19혁명으로 나라를 바꿨잖아요. 그리고 5,18이런 것을 보면 한국이라고 하는 나라는 대중의 희망에 의해 나라를 바꾸는 저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2008년에 촛불집회같은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우리가 한건 3,1운동때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듯이 우리가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가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런 것 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게 지금 20,30대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주었고 그게 쭉 갈 거라고 보아요. 저는 이런 것에 희망을 가지고 있어요. 당장에 성과는 없어도 우리가 이런 평범한 사람들 교육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사업을 꾸준히 하면 언젠가 그 효과가 날거라고 생각해요.

-이번에 평화길라잡이 대표가 되신 걸로 아는데 대표가 되어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싶은 계획이 있나요?
 길라잡이들이 다 특이한 조직인데 저희는 사무국이 있기는 하지만 평화나 도성도 그렇고 다 자원활동 조직이에요. 회원들도 다 학생이나 직장인이어서 일을 막 크게 할 수도 없고 어떻게 보면 크게 하는 것도 지나친 욕심이라고 봐요. 한 달에 한 번씩 안내를 어쨌든 잘 하고 그 안내가 단지 의무감이 아니라 안내를 통해 자기가 성장하는 과정이 되야 한다고 봐요. 자기가 만족을 못 느끼면 실패한 거죠. 어떤 일을 세워서 하기는 어렵고 다만 이제 평화길라잡이가 작년에 6기를 모집했는데 그 전에 2년을 쉬었어요. 여기에 오면 우리 역사의 고통이 많은데 이걸 풀어나가야 되지 않겠냐고 얘기해야 되니까 아무래도 안내에 대한 중압감이 크죠. 그래서 그런지 저희가 많이 모집을 못했는데 앞으로는 지속적으로 모집하려 해요. 저희가 아마 3월달에도 모집을 할 계획이에요.
 그리고 저희 내부에 ‘생각의 골목길’이라는 독서모임이 있는데 거기서 일련의 읽을 만한 책들 제안을 받아서 그걸 가지고 월별로 정해서 읽어요. 6기분들은 굉장히 열성적이어서 월별로 2권씩 읽자고 하시더라고요.(웃음)
 또 하나는 저희가 답사를 다니거든요. 저번에도 현충원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다녀왔는데요. 그냥 가는 게 아니고 우리끼리 서로 역할분담을 해서 안내를 준비해가요. 우리가 스스로 준비하고 우리끼리 나누는 그런 것들. 이건 제가 준비한 게 아니고 원래 하던 건데 이런 것을 잘 이어가는 것이 저의 계획이에요.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안내가 편차 없이 다 비슷했어요. 그런데 앞으로는 중요한 현안이 있거나 그달에 관련된 이슈가 있으면 그와 관련된 특화안내도 해보고 싶어요. 인혁당 사건이라고 있는데 법정대법원 사형확정판결이 나고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 일이 있었어요. 지금은 다 무죄 판결을 받았죠. 그 배상금 받은 걸로 돌아가신 4월 9일을 따서 4․9재단이 설립되고 매년 그 즈음에 그 재단에서 전시회를 하는데 그때도 저희는 안내를 원래하던대로 했거든요. 근데 그건 좋은 것 같지 않더라고요. 올해 생각은 4월 정도에는 그즈음에 인혁당사건을 중심으로 좀 더 집중적으로 안내를 해보고 싶어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겠죠. 그것 외에도 큰 사건, 예를 들어 8,15때도 안내를 하고픈 맘이 있어요. 안내라고 하는 건 자기 것으로 그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고는 어려우니까 노력을 많이 해야 되겠죠.
 
 또 제 개인적인 취향이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안내를 대중들에게 부담 없이 공감을 얻을 수 있게 준비하고픈 소망이 있어요. 제가 안내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것들은 많죠. 하지만 제 의견만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면 공감을 얻기가 좀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안내에 적절히 풀어낼 기술이 필요해요. 그런 기술을 회원들끼리 공유하고 싶어요. 아무래도 나이를 먹다 보니까 저 몇 살로 보여요?(웃음) 제가 40이 넘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좀 보수적으로 변해가는 건 어쩔 수 없네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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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20대때는 많이 진보적이셨나요?
 저는 원래 대학졸업하고 직장에 2년 다니다가 민주노동당에서 꽤 오래 활동했어요. 지금의 통합진보당이죠. 아무래도 그때는 확실히 지금보다 진보적이었죠.

-계속 정당활동을 해오시다가 이번에 시민활동에 참여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고 저는 정당 활동과 시민활동을 같이 했어요. 굉장히 특이한 케이슨데, 저는 지역의 시민단체활동을 쭉 같이 해왔기 때문에 일반적인 정당 활동을 하는 사람들과는 다르죠.

-정당 활동에 참여하게된 계기가 있었나요?
 얘기가 긴데 제가 91학번이에요. 운동권은 아니었고 개인적인 성향이 되게 발동이 늦게 걸리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군대에 다녀오고 나서 고민을 구체적으로 하고 책도 꽤 봤어요. 김동춘 교수 책을 많이 봤어요. 그때는 그분이 강사시절이어서 논문이 많이 나왔어요. 근데 그 분 책을 다 읽은 것도 아니고 그 책 서문을 읽다가 확 꽂히는 구절이 있었어요. ‘한국사회가 본질적으로 변하려면 노동자들이 정당을 만들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이런 내용이 한국사회 노동자 연구라는 책 서문에 써있었는데 제가 그 문장을 읽고 꽂혔죠. 그래서 1997년 대선에 권영길씨가 국민승리쪽에서 대통령후보로 나왔었는데 과에서 저 혼자 권영길 찍으라고 친구들에게 그러고 했죠. 저는 운동권하고 직접 관계가 없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선거가 끝나고 졸업을 했는데 직장을 다니다가 한겨례 신문인가 어딘가에 보니 국민승리지부 회원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있더라고요. 근데 그걸 보니 ‘아 여기가 아직 살아있네?’하면서 되게 반가워서 회원으로 가입을 하고 그때 당원번호 522번이라는 굉장히 빠른 번호를 받았죠. 회원가입을 하니까 소속 지역모임이 있어 나갔는데 저 혼자 20대고 다 40대여서 자연히 제가 일을 하게 되고 그러다가 2000년에 선거가 있었는데 그때부터 상근을 하게 되었죠. 민주노동당에서 상근을 2005년까지 6년간 했죠. 그 이후로는 간부로써 활동했고요.

-정당 활동을 하면서 시민활동도 하셨는데 그때 계셨던 시민단체는 어디셨나요?
 저는 ‘고양금정굴사건’이라고 한국전쟁당시에 민간인들 100여명이 법적 절차 없이 경찰과 우익단체에 의해서 학살당한 사건이 있어요. 그 사건이 1993년인가 처음 알려졌거든요. 지역에 대책위원회가 꾸려졌었는데 당에 파견된 사람으로 참석을 하다가 당일과 관계없이 그 문제에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아져서 활동을 했죠. 제가 지역에서 활동한 건 고양예산감시네트워크의 집행위원장으로 일을 했어요. 고양시의 예산을 감시하는 걸 했는데 그걸 2008년까지 했고 재밌게 했지요.

-거기서 무슨 일을 하셨나요?
 그니까 이제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가 지금도 그렇지만 돈을 너무 함부로 써요. 그러니까 자기 돈이라면 그렇게 안쓸텐데 개발사업을 한다고 벌이기만 하는 거예요. 그런 돈과 지방의원들이 돈을 이해관계자들한테만 주기도 하고 투명하게 안 쓰는 걸 감시했죠. 또 의원들이 일상적으로 의회활동 어떻게 하는지 저희가 직접 상임위, 본회의 할 때 방청으로 들어가서 출석 잘하는지 발언을 잘하는지 자료준비는 충실히 해오는지 다 모니터링 하죠. 국회에 국정감사가 있잖아요. 지방의회는 행정사무감사가 있는데 이 모니터링을 전국에 그런 단체가 없는데 모든 일정을 다 모니터링한 적이 있어요. 그 때 행정사무감사 우수위원 발표하면 의원들이 그거에 대해 신경을 많이 썼죠. 왜냐면 우수위원으로 일등을 하면 선거 때 그걸 내세우기도 하고 또 결과가 하위권이면 그걸로 공격을 당하기도 하고 했으니 시민단체가 공신력이 있었죠.

-이 단체가 서울에 있지 않고, 지방의 단체이기 때문에 특별히 힘든 점은 없나요?
 사실 고양시 인구 백만이 가깝게 되는데 서울에서 굉장히 유명한 사람들이 고양시에 많이 살아요. 시민단체 유명한 사람도 집은 다 고양시에 많이 살아요. 근데 되게 아쉽죠. 왜냐면 중앙에서는 열심히 하는데 동네에서는 아무것도 안하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고양시가 전국에서 시민운동이 가장 잘되는 곳이에요. 제가 고양시민사회연대단체에서 일하잖아요. 근데 이런 연대단체에서 상근자를 두는 데도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기초 단체에 33개 단체가 참여하는 데도 많지 않아요. 그런 걸 보면 고양시가 되게 의식 있는 시민들이 많은 편이에요. 그래서 시민운동하기도 좋고 시민단체도 많죠. 여기서는 시민단체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어요.
 이런 영향력을 여실히 보여준 일중에 예전에 가장 유명했던 사건이 러브호텔 반대사건이라고 있었어요. 신도시를 개발하면서 아파트 분양이 잘 안되니까 아파트 바로 옆에 모텔을 막 지은 거예요. 잠을 자기 위해서 오면 상관이 없는데 서울에서 아무래도 불륜주부, 아저씨들이 오는데 그런 걸 애들이 보니까 문제가 되서 9시 뉴스까지 나왔죠. 그 때 고양 시민단체가 확실히 보여줬죠.

 또 최근에 제가 뿌듯하게 느끼는 것 하나가 고양예산감시네트워크에 있을 때 일인데, 지금 의정부 경정철은 눈이 오면 서잖아요. 용인 경정철도 에버랜드에 헌납하듯이 하잖아요. 근데 고양시도 그걸 만들려고 했어요. 근데 저희가 예산감시 활동을 하면서 그 정보를 미리 안거에요. 그래서 결정하기 전에 주민들에게 알리고 공청회단계부터 해가지고 결국 시가 포기했어요. 그 예산이 엄청난 돈이고 유지 관리비를 포함하면 적자가 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때 ‘우리가 정말 큰 예산 낭비할 걸 막았구나‘라고 생각했죠. 이런 예산 감시활동을 보면 시민운동이 꼭 반대하는 것 말고도 행정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평상시에 감시를 하는 게 중요해요.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정부나 지자체는 무슨 일을 할 때 절차가 있어요. 그때 초기 단계에 개입을 하면 우리가 막을 수 있고 그쪽에서도 쉽게 접을 수 있어요. 하지만 일반 주민들은 우리 집 앞에 나무가 뽑히고 나서야 알거든요. 그래서 그걸 미리 알아서 했다는 게 많이 뿌듯하고 잘한 거라고 생각해요.

-이 단체는 처음에 어떻게 발족된 건가요?
 2010년에 고양무지개연대가 만들어졌어요. 그때 야권단일화를 추진했지만 실질적으로 단일화에 성공한 건 고양시밖에 없을 거예요. 고양시는 1990년데 지방의회 선거할 때부터 시민후보를 내기시작해서 6~7명 정도가 의회에 들어갔어요. 그 후 지방선거 때마다 시민후보를 내왔어요. 그러던 중 2010년 지방 선거 때는 정당후보와 시민후보를 다 같이 나오는 상황이어서 그 시민단체랑 정당이랑 무지개연대를 꾸린 거죠. 그때 시장을 무지개연대에서 당선시켰고 여기 시의원의 절반가까이를 무지개연대에서 당선시켰죠. 훌륭한 게 보통 경선을 하면 소수정당은 당선이 잘 안되잖아요. 근데 그때 진보신당 의원 1명, 국민참여당 의원 둘, 창조한국당도 있었고 정말 정당을 갖고 있던 데는 다 당선돼서 정말 무지개가 된 거죠. 근데 이 무지개연대의 성과를 이어받아서 시민단체들이 좀 더 책임감 있게 지역사회에 헌신해야겠다는 의견이 나와서 그 뒤로  연대회의를 만들고 상근자도 둔거죠.

-마지막으로 20대 청년세대들에게 해주고픈 말이 있으신가요?
청년들에게는 하고픈 말보다 미안함이 좀 있죠. 저희 때까지는 그래도 하고 싶은 거 하고 산 마지막 세대거든요. 근데 요즘친구들은 그렇지 못하니까 그런 게 미안해요. 다만 아쉬운 거는 자기 스스로 좀 판단하고 찾아보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게 좀 약한 것 같아요. 쉽게 휩쓸리기도 하고요. 그래서 특별히 하고픈 말 보다는 “나는 내 일을  더 열심히 하고 살아야 겠다“ 뭐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일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실안에서 왼쪽부터 이재정회원, 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안미선 소장님, 박형호 인턴, 박수민 인턴


인터뷰후기
항상 회원님들을 만나고 오면 그분들이 저희를 마치 가족이 온 것처럼 반갑게 맞이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재정 회원님 역시 저희가 왔을 때 오전까지 하셔야 되는 업무가 있는데도 즐겁게 맞아서 인터뷰를 해주셨는데요. 같이 대화를 하며 들으니 마치 평화길라잡이 안내를 듣듯이 매우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가치에 관해서는 사람들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달해야할 사실과 가치가 있으니 앞으로도 계속 안내를 하시며 조금씩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싶으시다는 말이 가장 와 닿았습니다. 정말 촛불집회를 3,1운동이랑 겹쳐서 생각해본다면 당장 지금 현재는 일제강점기의 시대처럼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암울한 시기일지 몰라도 이것이 하나의 맹아가 되어 25년 우리나라가 광복을 한 그날보다 더 빨리 나라가 바뀌고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터뷰에 성실히 응해주신 이재정 회원님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