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아카데미 답사후기] 인권탄압의 건축, 남영동 대공분실

By |2014-06-18T13:08:33+00:006월 18th, 2014|서울KYC 뉴스|

6월 근현대사 아카데미의 주제는 87년 6월 항쟁이었습니다.

27년전, 6월 전국의 도시 곳곳에서 거리로 뛰어나온 사람들.
그 사람들의  열기로 호헌철폐! 직선제 개헌을 이루었고,
직장에서, 학교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 제도적 민주주의의 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당시 대학생이었던 박종철 열사의 의로운 죽음을 생각합니다.

근현대사 아카데미 6월 답사는
박종철을 만나는 공간.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입니다.

6월 근현대사 아카데미 답사 : 6월 14일 토요일 오후 1시~오후 4시

1시~2시 박종철 그리고 6월항쟁 : 김학규(박종철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2시~4시 인권탄압을 위해 만들어진 ‘남영동 대공분실’ : 안창모(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 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는 대학생이었던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에서 나온 말입니다.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이었던 박종철은
‘대학문화연구회’라는 비공개써클에 가입하고
2학년때는 과 대표를, 3학년때는 과 학생회장을 맡아
언어학과와 인문대 학생회 활동도 열심이었고, 학생운동에 가담하게 됩니다.
수배중인 선배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경찰이 참고인이라는 명목으로 불법연행 하여
물고문을 비롯한 모진 고문을 당했고
이러한 고문에도 박종철은 선배의 소재를 밝히기 거부했습니다.
결국 고문으로 인해 사망하게 되면서
당시 치안 본부장이었던 강민창은 냉수를 마시고 수배중이던 선배의 소재를 물으며
심문을 시작했는데 갑자기 억 하고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사망하였다고 공식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망원인이 가혹한 고문때문이었음이 밝혀지며
박종철 열사의 의로운 죽음은 87년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 라는 말은
폭력적인 군사정권을 조롱하는 말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고 합니다.

당시의 현장이었던 남영동 대공분실을 답사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답사의 시작은 박종철 기념사업회의 김학규 사무국장님과 함께 했습니다.
당시의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은 현재 경찰청 남영동 인권센터가 되었습니다.
밖에서 건물을 보면 조사실이 있었던 5층은 창문이 세로로 길게 되어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는 조사받는 사람이 밖으로 뛰어내리지 못하게 하거나,
밖을 보기 어렵게 하여 밖의 상황을 알지 못하게 하려던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한 사람은 건축가 김수근입니다.
‘이 건물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인지 정확히 알고 설계한것이 아닐까’ 싶을만큼
건물의 외관도 그렇고, 끌려온 사람들이 공포를 느낄 수 있도록
청각적으로도 세밀히 설계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외관은 5층 창문을 보면서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청각적으로 세밀히 설계되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남영동 대공분실 정문은 철문으로 되어있고 미닫이문처럼 옆으로 열립니다.
그렇기에 더 강하고 밖에서 쉽게 열 수 없게 만들어져있습니다.
그리고 철문이 열릴때에 나는 소리는 마치 탱크가 지나가는 소리와 비슷하여
공포감을 더 높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청각적으로 공포감을 주는 요소입니다.

조사실이 있는 5층으로 가기 위해 건물 정문이 아닌 건물 뒤쪽으로 향했습니다.
건물 뒤에는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  도성의 암문처럼 살짝 숨겨져있는 문이 있었습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니 나선형 계단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나선형 계단이 바로 조사실이 있는 5층으로 가는 계단입니다.
1층부터 5층까지 이어져있는 나선형 계단을 오르다보면
내가 있는 곳이 몇층쯤인지 알 수 없고, 5층에 도착하더라도
몇층까지 올라온것인지 짐작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도 5층까지 올라가다보니 어지럽고 방향감각이 없어지는듯한 느낌에
한번씩 멈추었다 다시 올라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 계단은 철제계단입니다.
그렇기에 계단을 오르다보면 소리가 계속 나기 때문에,
눈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강제 연행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공포는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위치”를 알 수 없도록, 이곳이 어디인지 전혀 모르게 하기 위해 눈을 가리고
뒷문을 이용해, 저 나선형 계단을 통해 도착하는 곳이 조사실입니다.

5층 조사실에 올라오니 긴 복도와 양옆으로 같은 모양의 문들이 보입니다.
대부분은 잠겨있고, 여기 박종철 열사가 사망한 509호 조사실!
이곳만, 그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나머지 조사실, 인권탄압의 흔적은 모두 지워져버렸습니다.

좁고 높은 창문, 바닥에 붙어있는 책상과 의자
정교한 타일과 욕조, 변기, 세면대 그리고 아담한 침대

입구쪽 천장에는 검은 아크릴판 같은것이 보였는데
이는 당시 CCTV를 설치해 피조사자를 감시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안되지만, 당시에는 조명 농도도 조정이 가능했는데
이 역시 피조사자에게 공포감을 주는 요인이었습니다.

참고인으로 잡혀온 박종철 학생을 조사하기 위한 완벽한 시설.
도대체 이곳에서 왜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까..?
단지 참고인이었던 어린 학생에게 왜 그런 모진 고문을 했을까..?
박종철이 목숨을 걸명서까지 말하지 않았던 그 진실은. 지금 우리에게 무슨말을 하고 있나요..?

다른 어떤 설명보다, 박종철열사의 영정사진에 마음이 무너집니다.
당시 대학생이었다는 선생님의 설명을 빌리자면
유행하던 머리스타일과 골덴 자켓, 잠자리 안경
나와 같은 모습을 가진 또다른 우리들이 저렇게 있구나…
박종철의 앳된 모습과 평범한 차림의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눈에 들어왔던 또 하나는 조사실의 문이었습니다.
조사실 문에 현관문 외시경이 있었는데요.
보통 아파트 같은곳에는 문에 구멍이 있어서 안에서 밖을 볼 수 있는데
여긴 반대로 밖에서 조사실 안을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문은 전부 동일한 색이어서 복도에 서서 봤을때에는 어디가 조사실이고,
어디가 출구인지 헷갈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출구 위에 비상구 등이 있긴 하지만요.

그리고 남영동 대공분실에서는 박종철 열사 뿐만 아니라
고 김근태 의장이 고문을 당했던 조사실도 있습니다.
가장 끝방 2개는 다른 방보다 넓은 곳으로,
이곳은 소위 대장급 사람을 조사할때 사용했다고 합니다.

영화 [남영동]에서 보았던, 전기고문을 하기 위해 사용된 칠성판.
그것이 딱 맞게 들어갈 만한 넓은 장소였습니다.
조사실은 비어있었지만 더운 날씨에도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 조사실에서는 여러 간첩조작사건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간첩이 아니었지만 고문으로 인해 간첩이 되고, 징역을 살았고,
이후 사회적 냉대와 편견으로 고통스런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많았고,
2000년대에 들어서야 겨우, 재심으로 무죄 선고를 받아 명예회복이 되었습니다.

군사정권,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사람들을
쥐도새도 모르게 끌고와서, 가혹한 고문으로 결국엔 거짓 자백을 받아냈던!  
정권의 안위를 위해, 권력을 유지하기위해
‘만들어진 빨갱이’와  간첩들이 수없이 많았던 시대.
이러한 일이 있었던게 불과 3~40년 전입니다.

무고한 시민들의 인권을 짓밟고, 생명을 앗아간 무시무시한 남영동 대공분실
도시 한복판에, 남영역에서도 떡허니 보이는 곳에 우뚝 솟아있는 건물.
한낮에 와도, 으스스할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4층은 박종철 기념 전시실과 인권 교육 전시관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박종철 기념 전시실에 들어서니 1980년대 시대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들과
박종철 열사와 관련된 자료들이 보였습니다.

박종철의 의로운 죽음은 많은 국민의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국민들이 마음속에 갖고 있던 ‘민주주의를 쟁취하겠다는
열망의 의지’에 불을 지폈고,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박종철 고문·치사·은폐·조작사건의 진상폭로로
급속도로 타들어가는 도화선이 되어 마침내 6월 민주항쟁으로 폭발하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이 담긴 기사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박종철 열사의 어릴때 사진, 입었던 옷, 자필 편지 등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재수를 준비하던 누나에게 이것저것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며
살뜰하게 챙기는 마음이 따뜻했던 박종철.
너무나 평범한 대학생들이 정권유지를 위해 희생되었던 시대.
그 시대는 이제 평화롭고, 인권과 민주주의가 지켜지는 시대로 변한 것일까요?

이날 함께해주셨던 김학규 사무국장님은 박종철 열사와 동기였다고 합니다.
사망소식을 듣고서 분노했지만, 그와 동시에 공포감도 느꼈다고 합니다.
당시 수배중인 상황이었기에, ‘경찰에게 잡히면 나도 종철이처럼 되겠구나’
그냥, 보통의 평범한 대학생이 어느날 끌려가서 죽을 수도 있구나.. 하는
공포와 분노가 동시에 일어나는 감정이었습니다.
박종철 열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다가 목이 메이셨는데
그 모습에 이야기를 듣던 우리들도 울컥하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마무리를 하시며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요즘은 사람들에게 전문성을 가진 사람,
즉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단순히 전문성만 가지는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인권 등의 기본 소양을 갖춘 전문인이 되어야 한다.
만약 이러한 기본 소양이 없으면 전문성을 악용하게 될 수도 있다.

김학규 사무국장님의 말씀처럼 기본 소양을 갖추기 위해!!
우리사회 구성원으로써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 교양을 위해서라도!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배우는 것이 너무나 소중합니다.
우리 사회가 변화해온 방향, 지금 우리사회를 만들어온 소중한 가치.
평화, 인권,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야 겠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이야기를 요즘 많이 합니다.
과거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진실을 배우고, 잘못된점이 무엇인지를 알고,
잘못을 반성하고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함께 노력한다면/ 행동한다면,
더 살기 좋은 세상,
평화, 인권, 민주주의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고 소중하게 지켜지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두번째 답사도 다시 남영동 대공분실입니다.
안창모 교수님과 함께 ‘남영동대공분실은 독재권력의 의지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
이데올로기와 건축을  주제로 합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건축이 정권에 의해 얼마나 악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하셨습니다.
건축가는 이 곳이 어떤 목적으로 사용될지를 알고 있었는가?
건축물중 남영동 대공분실만 이데올로기, 권력에 의해 악용된 사례인가?
실제로 공포감을 주는 요소들이 곳곳에 있지만
남영동 대공분실 말고 다른곳들도 이와 비슷한 경우들이 있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도시와 건축을 통해,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지배했을때 조선에 유럽 건축물들을 만들어
이를 통해 자신들의 힘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일본 건축물은 대부분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받은 요소들이 많기 때문에
당시 강국이었던 유럽식의 건축물을 통해 지배자의 힘을 과시하고자 했습니다.

같은 양식의 건물이어도 활용 방식이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유럽의 건축 양식은 일본에서는 자주적 근대화를 보여주는 양식이지만
한국(당시 조선)에서는 타국의 지배를 위해 활용한 경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건축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남산에 있는 자유센터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기에 미국의 인정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 미국이 중요하게 생각했던건 반공이냐, 아니냐 였습니다.
소련과 이념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던 시기였기에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유센터를 건립하여 아시아 반공연맹 회의를 유치하며
본인의 ‘반공’의지를 분명히 드러내어 미국의 인정을 받고자 했습니다.
이렇게보면 자유센터는 무척이나 정치적인 건축물입니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혹시 공산주의라 생각하시지는 않으시나요….?
예전에는 민주주의의 반대말을 공산주의라 가르치며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키웠고 이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의 반대말은 자본주의 입니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독재이구요.

독재 정권에서 민주주의의 반대는 공산주의라며,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많이 만들어냈고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는것 같습니다.

건축을 통해서 사람을 바꿀 수도 있다고 합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박물관(Museum)이 많은데,
이것은 계몽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도시와 건축으로 사람의 생각과 생활을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바꾸고자 했던 모습이 사회주의 국가 건축물에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건축학적 관점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은 높은 퀄리티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음침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검정색 타일은, 우리나라에서 잘 사용되지 않던 형식인데
1976년 검정타일 과감하게 사용한 것은 김수근 건축의 특징입니다.(공간 사옥도 마찬가지)
좁고 긴 창문도, 그 당시 선진국에서 유행하던 스타일을 그대로 쓴것이라고 하네요.

또한, 509호 박종철 열사 조사실에 있던 주황색의 타일!
타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밀한 디테일들이 보입니다.
예를들어 꺾이는 가장자리 부분은 그 모양에 맞게 타일을 잘라
붙인 모습이 보입니다. 이건 정말 많은 공을 들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합니다.
인테리어가 중요한 공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디테일이 살아있다니.. 놀랍습니다.
내부에는 흡음재를 사용해 소리들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방음 처리를 한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나선형 계단을 이야기했었는데요.
엄밀히 말하면 1층부터 5층까지 나선형 계단으로 설계한것은 건축법에 어긋난다고 합니다.
각 층을 구분할 수 있도록 계단의 폭이 다른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계단처럼 말이죠.
그러나 남영동 대공분실의 나선형 계단은 몇층인지 알 수 없도록
일정한 폭의 계단이 1층부터 5층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 계단은 건축주가 요구해서 만들어진것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남영동 대공분실이
고문과 취조를 위한 목적으로만 건축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5층 조사실의 창문이 좁고 긴 것이 조사자의 자살을 막기 위해서라고 이야기되지만
당시에 그러한 창문형식이 유행이기도 했고, 남영동 대공분실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건축물에도 그와 같은 모양의 창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말한것처럼 조사자의 자살을 막기 위해서였을수도 있고,
아니면 그 당시의 유행하는 창이었기에 창문 모양을 달리했을수도 있습니다.
둘 다 일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조사실의 문도 서로 마주보는 방향이지만 겹치지 않도록 되어있는데,
이에 대해 문을 열었을때 피조사자들이 서로를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건축물을 설계할때 이와같은 방법으로 한다고 합니다.
이는 동시에 문을 열었을때 복도를 지나가던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하기위해서입니다.

실제로, 김수근씨가 남영동 대공분실을 짓는 목적을 알았을지,
알지 못했을지는 현재 알수는 없습니다.
김수근씨는 고인이 되셨고, 그의 제자들이 한국 건축계를 이끌고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유신헌법아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시민들을 억압.탄압하던 시기.
잘못된 권력 유지를 위해서 건축을 활용할때,
건축가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목적이 정의롭지 않다면, 건축설계를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김학규사무국장님의 마지막 말과도 같은 뜻이라 생각합니다.
기본적인 소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정의롭지 않은 목적일때에
자신이 제안받은 일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남영역에 내리면 바로 앞에 보입니다. 플램폼에서도 보입니다.
이렇게 역과 가까운 곳에 아픈 역사의 현장이,
잊어서는 안될 역사의 현장이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고
답사에 함께해주는 김학규 사무국장님과 안창모 교수님 덕분에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서 더 뜻깊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근현대사 아카데미 최초로! 서울에서 진행되었던 답사라 일찍 끝난 덕분에
답사에 함께하신 분들과 함께 뒷풀이를 했습니다.

매번 답사가 끝난 뒤 서울로 올라오면 바로 막차를 타야하는 시간이어서
인사만 하며 헤어진것이 아쉬웠는데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더 즐거웠던 답사였습니다.

6월 근현대사 아카데미 답사와 뒷풀이에 함께해주신 여러분들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7월 실내강의와 답사에서 다시 만나요~
사진 제공해주신 조인숙, 최명숙 회원님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