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준호) 선조를 위한 변명(?)

By |2005-05-31T05:28:11+00:005월 31st, 2005|사무국과 탱고를|

요즘 드라마 이순신을 즐겨 본다. 때론 너무 집중한 나머지 20개월 된 아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기도 한다. 덕분에 내전(?)의 위기까지 간 적도 있다.

최근 선조가 부산을 공격하라며 이순신을 압박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이순신은 왕이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승산 없는 싸움은 하지 않겠다며 때를 기다린다. 왜냐하면 수군마저 무너지면 전쟁의 흐름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고 이렇게 되면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지킬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당시의 관점에서 볼 때 왕조국가인 조선에서 이런 주장은 굉장히 위험한 주장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이고 왕과 왕자들이 죽게 된다면 나라(조선)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성과 나라의 안위를 위해서 의주로 피난 간 임금을 간접지원하기 위한 부산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은 반역의 의지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선조 입장에서는 눈에 불이 들어오는 게 당연하다. 설령 전쟁에서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하더라도 이순신 같은 장수에게 본보기를 보여 놓지 않으면 난리통에 왕의 권위는 완전히 무너지게 되고 전쟁이 끝나도 그 이후를 보장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조는 백성 수천 수만이 더 죽더라도 왕권을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것이 물려받은 왕권을 후세에 온전히 물려줘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단, 전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말이다.

따라서 선조를 인격에 문제가 있는 사람정도로 볼 것이 아니라 당시 선조의 입장에서는 ‘필연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고 이해해 주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다. 선조도 아마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현재의 눈으로 볼 때 선조의 태도는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 시대의 요구를 저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며 대의를 지키는 모습으로 공감을 얻는 것은 이순신이다.

문뜩 나는 오늘날 또 다른 ‘선조’를 발견하게 된다. 조직이나 또는 나라를 위해 ‘나’를 지키려하지만 결국 그것이 시대의 요구 또는 조직 구성원들의 요구를 배반하게 되는 경우가 그렇다. ‘나’를 지키려는 힘이 강할 때는 구성원들이 느끼는 고통은 더 커지고 오히려 잃는 것이 많아지는 것 같다.

4백년전이나 지금이나 현명한 판단은 ‘나’를 버리고 시대의 요구를 선택하는 용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일이 있었습니다.>

5월 26일 일본어 초급 회화 강좌(소라미미반)

5월 30일 좋은친구만들기 10기 오리엔테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