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근현대사 아카데미는
한국 근현대사 “광장 민주주의” 시작이라고 하는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했습니다.
이이화 선생님과 함께했던 실내교육
120여년전, 그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민중들의 항거!
“농민들”이 들고일어나, 과거의 폐습을 없애고
부정부패 척결로 사회를 바로잡고,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등
그야말로 아래로부터 시작된 “혁명”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1894년에 동학농민군의 함성과 투쟁은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혁명, 갑오농민전쟁, 동학난 등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전국각지에서 일어난 농민군의 봉기,
그 중에서도 우리는, 혁명의 시작을 알린 “정읍”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동학역사문화연구소 조광환 소장님과 함께 동학농민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봅니다.
마을 언덕 위, 사발통문 서명자 후손자들이 건립한 동학혁명기념탑!
죽산마을, 송두호의 집에서 전봉준 등 20여명이 모여
고부 농민 항쟁을 계획하고 그 결의 내용을 적은 후,
사발을 엎어놓은 모양으로 20여명 참가자들이 서명하여
각리의 집강에게 돌렸다하여 일명 사발통문이라 합니다.
농민들의 봉기는 사발통문으로 작성된 것처럼,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거사 계획은 고부군수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발령되어 보류되었으나,
이듬해 1월 10일 고부 봉기로 점화되었습니다.
19세기 세도정치가 이루어지면서, 중앙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탐관오리가 득세하였습니다.
매관매직이 성행하며 과거제도는 유명무실해지고, 민심이 동요하며
삼정 즉 전정(토지세), 군정(성인나자들이 군대 안가는 대신 내는 세금),
환곡(춘궁기때 관곡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갚도록 한 제도)이 문란해져
농촌사회의 파탄을 가져왔고,
봉건사회의 모순과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의 불만은 커져만갔습니다.
한편 개항이후, 청일 양국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조선은
일본 식량공급지이자, 일본쌀 수입이 늘어나면서 민중들은 물가고와 식량부족에 허덕이게 됩니다.
이런한 상황에서, 전국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게 됩니다.
고부지역은, 호남제일의 쌀 생산지이며 농산물 집결지로,
봉건적 수탈과 일제의 경제적 침략이 극심한 곳이었습니다.
특히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이 심각해, 전봉준을 중심으로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결의
드디어, 고부봉기가 일어납니다.
고부봉기는, 이전의 농민봉기와 전혀 차원이 다른 것으로
전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진격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지역봉기를 넘어, 전국적 혁명을 계획한 것입니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 “사람이 하늘이고, 밥이 하늘인 세상” 을 만들고자 한 반봉건항쟁
외세의 국권침탈에 맞서 보국안민을 이루고자 했던 반외세 항쟁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입니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고택은, 찾는이 없이 쓸쓸하게, 뜨거운 해를 맞고 있습니다.
이곳은, 고부 농민 봉기가 일어나기 수년전에 전봉준이 살던 곳으로
훈장생활을 하면서, 고부봉기 전까지 머무렀던 집터입니다.
전봉준의 유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전봉준은 동학조직을 이용하여, 농민봉기를 전국적으로 확산해가려고 합니다.
고부 동학교도들과 농민군들이 무장하고, 1894년 1월10일 말목장터에 집결합니다.
고부관아를 점령, 감옥을 부수고 무고한 백성들을 석방하였으며,
창고문을 열어 곡식을 주민들에게 나눠줬습니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백산으로 진을 옮기며 부대로서의 대오를 정비하고 장기전에 돌입하였고,
각지에 창의격문을 발송하는 등 혁명의 전국화를 준비해갑니다.
고부관아 습격후, 농민군들은 바로 다음날 만석보를 허물어 버립니다.
만석보는 태인천과 정읍천이 만나는 곳에 쌓았던 수리시설로,
고부군수 조병갑이 강제로 농민들을 동원하여 쌓아놓고, 물세를 받아 원성을 자아낸 곳입니다.
태인천과 정읍천 가까이 이평이라 불리는 넓은 평야가 보입니다.
그 비옥한 땅을 많이 가진 사람이, 못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없는 착취가 벌어집니다.
사람들의 분노와 한이 서린 이곳에 오늘도 강물은 유유히 흘러갑니다.
혁명의 지속과 확대를 모색하던 전봉준은, 손화중과 의기투합하여
무장에서 포고문을 공포한 후 북상하여 고부관아 재점령,
김개남 등 지도자들과 함께 백산에 총집결합니다.
당시 농민군 숫자가 8천여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백산에서 농민군의 지휘체계와 조직 정비를 통해
황토현과 황룡촌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전라감영과 서울에서 파견된 관군을 격파한 후 파죽지세로 전주성까지 함락시켰습니다.
전주성 함락에 놀란 정부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고, 이에 일본도 조선에 출병을 합니다.
동학농민군은 외국 군대 철병을 위해, 폐정개혁27개조를 보고한다는 것과
해산할때 신변보장을 약속받고 전주화약을 체결, 전주성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조선을 대륙침략 교두보로 삼고자 했던 일본은, 전쟁을 도발하여
조선반도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납니다.
전쟁터로 변한 조선의 치안과 행정 공백을 메꾸기 위해 동학농민군은 ‘집강소’를 설치합니다.
집강소는 농민스스로 자치하는, 최초의 주체적인 농민통치 기구로서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폐정개혁을 실천에 옮겨갑니다.
정읍 곳곳에는, 동학농민군의 승리를 기념하는 승전탑과 동상이 들어서있습니다.
정치권력은 입맛에 맞게 “동학농민혁명 혹은 운동, 난리”로 해석하였고
민중들의 힘과 승리를 자신의 치적으로 비유하곤 했습니다.
기념탑이나 동상에 그 시대의 특징, 모양, 글귀가 들어있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일본군에 맞서 싸운 전봉준과 농민군을, 친일 작가 김경승이 만드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
황토현을 비롯한 동학농민유적지는 전두환 정권에 대대적인 정비가 이뤄집니다.
군부독재정권의 정당성을 “호국유적지” 정화 사업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한많은 전라도에서 전두환의 이름은 수없이 지워지고 덧칠해지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동학농민기념관입니다.
일본군이 철수하지 않고, 경복궁을 무단점령하고 친일내각을 수립하자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을 내쫓고자 반일항쟁을 기치로 2차 봉기를 단행,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서울을 향해 진군해갑니다.
여러 전투를 벌이면서, 농민군의 숫자는 줄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올라갑니다.
일본군과 마지막 전투. 우금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계속 돌진하는 농민군
목숨만큼 가치있는 것이 없을텐데…
근대적인 신무기에 맞서, 옛날 총들고 죽창들고 산으로 산으로…
관군과 일본 연합군에 맞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엔, 패하게 됩니다.
이 무모한 전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
농민군들이 목숨걸고 싸웠던 이유. 왜 그랬을까?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간절함이 아니었을까요?
“나는 어쩔 수 없이 노비로 천대받고 살아왔지만,
이제는 나처럼 천대받지 않고 평등한 세상에서 살 수 있다”는 꿈.
그것이 20-30만명이 죽어간 이유일 것입니다.
억압받는 수많은 사람들의 한과 소망이 모여 분출될 것이 동학농민혁명입니다.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신분제가 사라지면서 평등한 세상을 열었고 집강소를 통한 직접 민주주의의 실험이 빛났습니다.
제폭구민(폭정을 제거하여 백성을 구함)과 보국안민(나라를 돕고 민중을 편안하게 함)으로
인간존중, 사람이 다시 하늘이 되는 세상을 앞당겼습니다.
자유 평등 자주 민권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은, 이후 3.1운동과 해방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4.19혁명 등으로 이어져
민주주의를 열매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광장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
동학농민혁명을 들여다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 민주주의는 동학농민혁명에서 시작된 것을 다시한번 확인한 하루!
광장민주주의 시작은 동학농민혁명입니다.
답사에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7월 근현대사 아카데미는,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전국 봉기.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주제로 합니다.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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