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아카데미 3강 후기] 1980년 5월 광주의 봄

By |2014-05-21T12:04:48+00:005월 21st, 2014|서울KYC 뉴스|

서울KYC 근현대사 아카데미 5월
5월달에는,  34년전 발생했던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을 주제로해서 진행되었습니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천재교육) 저자인 이신철 선생님과 함께
“1980년 5월 광주의 봄”을 주제로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전후 상황과
5.18이 우리사회에 미친 영향 그리고 5.18 정신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민꺼리를 던져준 강의였습니다.

지난 5월 15일(목) 근현대사 아카데미 3강, 강의 내용을 공유합니다.

1. 우리가 기억하는 광주. 5.18

여러분들은 광주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518의 제대로된 이름은 뭘까요?
광주 5.18, 광주사태, 광주항쟁, 민중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며 불리게된 공식명칭은 [5.18민주화운동] 입니다.

‘광주’라는 지역을 넘어서, 우리사회 전체에 영향을 준 민주화운동이라는 의미에서
5.18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광주가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5.18민주화운동은 널리 알려줬고
광주는 민주주의, 인권을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에서는 ‘광주’라는 지역성에 붙잡혀있습니다.
세계화에는 성공했지만, 전국화에는 실패했다고 할까요?!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하던 언론은 광주의 진실을 보도하지 않았고
5.18 당시의 자료는 모두 외신(독일기자)에 소개된 것 뿐입니다.
계엄하에 있던 다른 지역과 광주는 철저하게 분리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되어갔습니다.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지금까지도
북한 배후조정으로 인한 폭동설이 나오고
심각한 역사왜곡, 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광주는, 여전히 안녕하지못한 현실입니다.    

2. 5.18 민주화운동의 전개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간의 시민항쟁이며,
광주의 이 열흘이 우리사회의 민주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979년 10.26 이후, 독재정권의 변화를 기대하던 많은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비로소 민주주의가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가질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1980년을 서울의 봄. 민주화의 봄이라고 불렀습니다.
대학내에는 민주화에 대한 열풍이 불었고, 전국적으로 집회와 가두시위가 일어나게됩니다.

12.12 쿠데타를 통해 전면에 드러난  전두환은 5.17 비상계엄령을 전국적으로 실시하며
모든 정치활동 금지, 집회 금지, 휴교령 등을 내리고 김영삼을 가택연금시키며 탄압합니다.

5.17비상계엄이 내려진 상황에서도 광주에서는 시위가 이어졌으며
5.18일 전남대앞에서 학생들과 계엄군 사이에 최초의 충돌이 생깁니다.
교문을 막고 있던 계엄군에게 항의하던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
이 폭력적인 진압과정이 입에서 입으로 광주시민들에게 전해지고,
직접 목격한 시민들이 늘어나면서,
학생들이 시작한 계엄군에 대한 저항에 시민들까지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광주지역 점령(진압)을 위한 작전 공수부대의 ‘화려한 휴가’는
20일 학생과 시민들의 저항에 대해 첫 발포가 시작하며 살육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21일 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 협상결과를 공유하기위해 전남도청광장에 모인 시민들.
때마침 울려퍼진 애국가에 모든 시민들은 멈추어 태극기를 향해 있었고,
애국가가 끝남과 동시에 시민들을 향한 계엄군의 집단발포.
오십여명 사망과 오백여명 부상.
(최초 발포명령에 대한 진실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음)

공수부대가 쏜 총에 죽어간 시민들을 보며,
살아남은 광주시민들은 무장을 할수밖에 없었으며, 스스로 시민군이 되었습니다.
시민군의 반격에 공수부대는 광주에서 철수를 하였지만,
이는 광주를 철저히 고립시키기위한 자발적 후퇴였을 뿐입니다.

22일부터 27일 공수부대의 진압이 있기전까지, 광주는 해방구였습니다.
치안은 물론이거니와 질서유지까지 그어떤 절도나 폭력사고가 일어나지 않았고,
끝까지 싸워 광주를 지킬것을 주장한 시민군은
전남도청으로 들어가 새로운 항쟁 지도부를 구성했습니다.
이 시기를 두고 스스로 꼬뮌을 구성하여, 권력의 중심이 민중으로 넘어가는 시기로
해석하기도 하며, 동학농민운동시 집강소와도 비교하기도 합니다.
*집강소 :한시적이기는 하지만 당시 농민의 계급적 입장을 대표하면서 폐정개혁의 실시를
지향한 농민군의 지방 자치기구였다. (두산백과 발췌)

외곽 모든 도로를 전면차단하고 광주를 철저히 고립시켰던 공수부대는
27일 다시 광주로 진입하여 도청에 남아있던 시민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합니다.
뿐만 아니라, 광주 전역에서 부녀자를 비롯하여 초등학생까지도 폭도로 몰려
강제연행했습니다.

광주항쟁 당시, 미항공모함이 들어왔다는 소식도 있었고
이에, 광주시민들은 미국이 독재정권 전두환을 처단하고
광주시민을 도와주러 왔다고 생각하고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공수부대 이동에 따른 휴전선 부근 안보공백에 대한
북한 압박을 위해 온 것을 알게됩니다.
이는 이후 미국에 대한 인식변화의 계기가 됩니다.  

3. 아직 오지 않은 5.18 정신 그리고 광주.

전두환 신군부 정권하에서
5.18 민주화운동은 ‘폭동’이라고 철저하게 왜곡되고 폄하되었지만
6월항쟁이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5.18을 잔인하게 진압한 신군부 일당을 청문회에 세우고
광주항쟁에 대한 진실을 밝히며 책임자를 처벌하기에 이릅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한국사회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자,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낸 87년 6월항쟁의 밑거름이며
반미운동과 통일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우리사회 전반적으로 민주주의, 통일, 평화, 인권, 참여, 연대의식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영향을 주고있습니다.
또한, 한국을 넘어 세계적 차원의 민주화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5.18 정신은 어떻게 계승되고 있나요?
5.18 정신은 무엇입니까?

초반에 말씀드린 대로, 5.18 민주화운동은 인권 민주 평화를 지키기 위한 시민항쟁으로
세계문화유산(기록)에도 등재될만큼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만,
정작 우리에겐 광주라는 지역성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광주 시민들이 지키고자 했던 ‘민주주의’ ‘민주화’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지금도 지켜지고 있습니까?
광주는 정치투표를 오랜동안 해왔고,
우리삶과 직결된 지자체 선거마저도 생활투표가 아닌, 정치투표를 해오고 있습니다.
권력의 모순과, 구조적 문제에 저항했던 5.18
현재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가 부족한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5.18정신이라면, 쌍차와 만나고 강정과 만나야 합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상징’만 있고,
기념사업으로만 존재하는 현재의 5.18은 안탑깝습니다.

더불어함께 좋은 세상, 공동체를 꿈꿨던 광주정신.
오월정신계승은 바로 사회적약자와 연대하며
우리사회의 민주주의, 평화, 인권, 통일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나가는 일일 것입니다.

산업화는 박정희가 이룬것이 아니고
민주화는 김대중이 만든것이 아닙니다.

우리 역사의 전면에 나섰거나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함께했던
수많은 민중들의 피와 땀으로 산업화. 민주화를 이뤄온 것입니다.

5.18도 역시 시민들, 민중들이 주체가 되어 만든 아름다운 항쟁입니다.
2014년 5.18은 어떤 모습일지, 5.18정신은 무엇일지
광주에서 잘 만나고 오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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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신채호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서 한 고등학생이 이런말도 했습니다.  
‘점차 사람들의 생각속에서 세월호사고가 잊힐까 두렵다’ 라고..

잊지 않겠습니다.  5.18 정신도! 세월호의 그 아픔도…
그리고,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왜곡도 꼭 바로잡아야겠습니다.


강의기록 협조 : 조인숙. 양승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