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아카데미 답사후기]민주화운동의 횃불이 타오른 광주를 가다

By |2014-05-21T13:20:00+00:005월 21st, 2014|서울KYC 뉴스|

5월 근현대사 아카데미에서는

민주화운동의 산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광주’로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5월 근현대사 아카데미 답사 : 5월 17일 토요일 오전 8시~오후 11시

5월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어린이날, 석가탄신일, 어버이날, 스승의날까지… 많은 기념일들이 5월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날이 하루 더 있습니다.

바로 5월 18일, 민주화운동 기념일 입니다.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역사의 현장인 광주에 다녀왔습니다.

5월 광주 답사 코스
국립5.18민주묘지 – 5.18 자유공원 – 전남대 역사관 – 오월길(금남로&옛 전남도청)

5월 광주 답사는 5.18 기념재단의 오월지기, 신호숙 선생님께서 함께해주셨습니다.
오월지기는 5월을 지키는 사람들로, 광주의 5.18 민주화운동을 알리기 위해
봉사하시는 고마운 분들이십니다.

광주 답사의 첫 시작은 국립5.18민주묘지였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저 앞에 광주민주화운동추모탑이 보입니다.
5.18 민주화운동 하루 전날이어서 그런지 추모탑 앞 광장은 행사 준비중이었고,
조금전에, 유가족들의 추모제가 끝났다고 합니다.
곳곳에는 광주의 민주화 정신을 기리기 위해 찾아온 많은 시민들과 대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이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위해 머리숙여 다함께 묵념.
1980년 5월. 이곳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어났을까요?

짧지만, 뜨거운 5월 17일 광주답사!
오월지기 신호숙 선생님과 함께 했던 답사의 내용을 공유합니다.
1980년 5월 광주, 그리고 2014년의 우리사회 민주주의를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1979년 10월에 부산과 마산에서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하여 일어난 민주화운동,
부마항쟁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과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둘 다 공수부대가 투입되었고,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하지만 부마항쟁에서는 사망자가 없었고, 당시 500여명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5.18 민주화운동에서는 수많은 사망자와 부상자자가 발생하였고,

아직까지도 정확한 수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3,000여명이 끌려가 고문과 취조를 당하였습니다.



당시 부마항쟁에 공수부대와 함께 투입되었던 해병대들에게는 두가지 명령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하나는 무기를 뺏기지 말것, 다른 하나는 시민과 학생들을 자극하지 말것.

이에 따라 해병대들은 맨몸으로, 무력(無力) 행진으로 시위대를 밀어냈다고 합니다.

그랬기에 당시 시민들은 해병대에게는 우호적으로 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5.18 민주화운동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는 달랐습니다.

1980년 5월 18일 전남대학교 학생회가 주축되어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에서

공수부대의 해산요구에도 학생들이 해산하지 않고 항의하자,

그들은 진압봉으로 학생들을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엄군의 잔인한 진압을 시작으로 10일간의 벌어진 5.18 민주화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무력(武力)진압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곳은 유영봉안소입니다.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추모하는 장소입니다.

사진처럼 많은 영정사진이 보였고, 그 중에는 앳된 얼굴의 학생들도 보였습니다.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말그대로 무차별적인 학살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곳곳에는 영정사진 대신 무궁화가 있었는데, 이는 사진이 없는 희생자분들이라 합니다.




그리고 유영봉안소 한쪽에는 사망일자가 아닌 행방불명된 일자가 적혀있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벌써 5.18 민주화운동이 34주년을 맞았지만,

여전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생사조차 확인이 안된 분들도 많았습니다.

1980년 5월,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노모가 된 지금까지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유영봉안소를 나와 신묘역으로 향했습니다.

신묘역 오른쪽에는 OOO(이름)의 령이라 적힌 비석만 세워져있을뿐

봉분이 없었습니다. 이 분들이 유영봉안소에서 봤던 행불자 분들이라 합니다.

매번 이곳을 찾을 가족분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신묘역에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많은 희생자들이 잠들어있었습니다.

사연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평범하기도 하고

가슴이 아파 눈물이 절로 흐르기도 했습니다.




5월 20일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첫 발포가 있었고

5월 21일 집단발포가 시작되면서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엄마가 사준 새 고무신을 신고나가 친구들과 뒷산 묘에서 놀던 중

총소리가 나 도망치다 고무신을 두고온게 생각나 다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된, 당시 국민학생이었던 아이…

고무신을 잃어버리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하였던 아이의 어머니는

왜 고무신을 잘 챙기라고 했을까… 라며 평생을 자신이 죄인인양

아이에게 미안해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 문득 세월호 침몰 사고가 떠올랐습니다…

아이의 잘못도, 부모와 가족의 잘못도 아닌데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게 만드는 비슷한 모습에

34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무장한 군인을 보고 신기하기도 하고 멋져보여서 손을 흔들었다가

발포된 총알에 죽은 아이, 딸아이가 100일이어서 잔치 후 친구들과 금남로에서

술 한잔 하다가 군인에게 붙잡혀 구타로 사망한 아버지,

남편이 오지 않아 마중을 갔다가 총알을 맞아 사망한 임신부까지…


평범한 일상을 살아오던 무고한 시민들이 너무나 많이 그곳에 계셨습니다.

아무죄없이 죽어간 평범한 시민들의 가슴 아픈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전남대의 한 학생은 상무관에서 당시의 시신들을 수습하는 자원봉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 어린 나이, 시신을 수습한다는게

두렵기도 했을법한데 친구와 묵묵히 그 일을 해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다 공수부대의 대대적인 진압이 있었던 날,

상무관의 뒷문을 지키다 헬기에서 쏜 총알에 맞아 이곳에 묻혔다고 합니다…

한 여고생은 사망자가 너무 많아 관이 부족해지자

관을 다른곳에서 구해오고자 미니버스에 올랐다가

공수부대가 버스에 총을 발포하여 사망하였습니다…

또 다른 여학생은 공수부대의 집단발포 후 피가 모자라 헌혈을 해달라는

방송을 듣고 병원에서 헌혈을 한 뒤 집으로 돌아가다가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사망하였습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광주를 지키기 위해, 내 친구를, 우리 이웃을 지키기 위해..

나와 같은 곳에 살던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다가 희생자가 된 사람들…

이 넒은 묘역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지금의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은,

시대만 다를뿐 사는 모습과  행동은 우리와 너무나 똑같은 시민들이었습니다.


당시 정부에서는 광주에서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주장하였지만,

일명 ‘폭도’들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시민들이었고,

그들이 일으킨 ‘폭동’은 너무나 일상적이었고,

민주주의와 광주, 내 자식을, 우리 이웃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죽어서라도 편한 세상을 만났어야 하는데..

여전히! 지금까지도 5.18민주화운동은 왜곡.폄하되어가는 현실이 가슴이 아픕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남은 사람들과, 희생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그냥 이렇게 눈물만 흘려서 해결되는 것이 있을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력감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신묘역을 둘러본 뒤 잠시 5.18 추모관에 들려 그 당시의 사진과 물건들, 영상을 간단히 보고

구묘역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구묘역은 5.18 민주화운동 이전부터 광주의 묘역이었던 곳입니다.

5.18 관련 사망자들이 5월 말에 망월동 묘역, 현재의 구묘역에 매장이 되었는데

당시 시신이 많아 손수레와 청소차에 시신들을 실어 망월동 묘역으로 왔다고 합니다.



지금은 5.18 희생자들은 신묘역으로 이장하였고,

구묘역에는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과 정신 계승,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다 돌아가신 민주열사와 노동자들을 위해 투쟁하신 노동열사들이 잠들어있습니다.

민주화 정신을 계승하며 스스로 분신을 했던 학생,

시위 진압과정에서 희생당한 청년들, 시민들이 이곳에 잠들어있었습니다.




5.18 하루전날 이어서, 구묘역 한쪽에서는

주먹밥을 만들어 나누어주시는 자원봉사자 분들이 계셨습니다.

1980년 5월, 여성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5월의 광주에서는 주먹밥조차도 새롭게 다가옵니다.




주먹밥은 5.18정신을 표현하는 상징 중의 하나입니다.

당시 시민군을 응원하기 위해, 광주시민들이 매일 밤낮으로

소금으로만 간을 한 주먹밥을 만들어서 날랐다고 합니다.

그 다시를 떠올리며 주먹밥 만들기 체험을 했습니다.

이 주먹밥은, 자신이 만든것을  먹을 수 없습니다.

정성스럽게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먹여줘야하는 5.18 주먹밥입니다.


당시 시민들은 시민군이 되기도 하고, 주먹밥을 만들어 전달하기도 하고,

피가 부족하다는 방송을 듣고 자발적으로 병원에 가 헌혈을 하고,

거리를 청소하기도 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직접 했다고 합니다.

계엄군이 물러간 후 일명 “광주 해방구”를 맞이하게 된 기간동안

광주는 무척이나 평화로웠다고 합니다. 광주시민들 스스로가 만든 열린공동체였습니다.

광주는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었지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협력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사진출처 : 한국관광공사>

5.18 자유공원은 5.18 민주화운동때 연행된 시민들이

조사를 받고 고문당하고, 군사재판을 받았던 헌병대 내무반과 법정 등을

원형 그대로 복원, 재현한 곳입니다.


이곳을 안내해주시는 분은 당시의 계엄군처럼 군복을 입고,

한 손에는 진압봉을 들고 계십니다. 말투도 군인처럼 이야기하며 긴장감을 주십니다.

허나, 이 분이 하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안내를 해주시는 분은 당시 이곳에 끌려와 조사를 받으셨던 분 입니다.

말그대로 5.18당시 부상자, 피해자들입니다.


자신이 감방에 있었을때 겪었던 일을 말씀해주시는데

무고한 시민들을 무차별 연행하고, 일상적인 폭력이 발생했던!

군사재판을 진행한다고는 하지만…. 무법지대가 바로 여기라고 하십니다.


헌병대의 내무반이었던 그 곳에 수많은 시민들이 잡혀 들어왔습니다.

좁은 장소에 수백명의 사람이 들어가있다보니 제대로 눕기도 어려웠고,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쉽게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구타가 이루어지고 독방에 여럿을 가두었답니다…

이 곳에 야학을 운영하던 청년이 끌려왔는데

말도 안되는 이 상황을 못이겨 벽에 머리를 스스로 박아 정신을 놓았다고 합니다..


본인에게는 당시에 겪었던 일들이 크나큰 아픔과 고통, 상처였을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알리기 위해, 역사가 왜곡되지 않게 하기 위해,

후손들이 광주를 폭도들이 살았던 곳이 아닌 평범한 시민이,

민주화를 염원했던 시민이 살았던 곳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주고 계시는 분들….

너무나 감사하고, 너무나 죄송했습니다.

한사람한사람이 소중한 역사의 산증인들입니다.

이분들이 계시기에 5.18정신이 계승될 수 있고, 또 기억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재판이 이루어졌던 곳에도 들어가봤습니다.

일반적인 경우, 총으로 무장한 군인이 재판에 함께하는 경우는 없으나,

1980년 5월, 이곳에는 곳곳에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조사와 고문으로 얻은 거짓조서를 가지고 재판을 진행하였으며

행여나 고문으로 인해 거짓진술을 했다고 진실을 이야기하면

그 사람을 다시 끌고 나갔다고 합니다…


당시 재판관이 들어오면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 일어났다가 앉았는데

일어난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 앉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이 순간만큼은 군인들도 제재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끌려온 이들에게 애국가는 소중한 국가를 위한 노래였습니다.




이곳은 5월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이었던 전남대학교입니다.

전남대학교에는 역사관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 곳에는 당시의 사진들과 전남대 학생들의 자필 글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전남대에 도착하였는데 전국 각지에서 온 대학생들과 깃발이 보였습니다.

잊지 않고 광주를, 전남대를 찾아온 학생들이 반갑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습니다.



전남대학교 출신 윤상원열사의 자료에, 임을 위한 행진곡 악보가 나옵니다.

지금 한창 논란이 되고있는, 5.18 기념식에서

임을위한 행진곡을, 자유롭게 부르지 못하게 하는 현실이 떠올랐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투쟁의 현장에서 불렀던 이 노래를 왜 못부르게 합니까?


윤상원.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에 올려진 이 노래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넘어, 전세계 정의를 외치는 모든 현장에서 불리고 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80년 당시 그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광주의 정서이기도 하고,

희생자들과 관련단체들의 절절한 요구이기도한데,

이 노래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겠다는 유족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는

현실이 참 답답하고, 가슴이 아픕니다.

정치적 해석은 경계하고!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피해자들의 입장을 심사숙고 해주길 바랍니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저항의 중심지! 금남로에 갔습니다.

5월 18일 이전과, 당일까지 학생들과 청년들의 시위는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를 진압하는 공수부대의 행위는 학살극이라 불러야 할 만큼

무자비했습니다. 그들이 사용한 진압봉은 맞으면 일어나기 어려웠고

부분적으로는 대검을 진압무기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보았던 시민들이 19일부터 금남로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폭력적인 진압에 항의하는 시민들을 향해 또 다시 계엄군의 잔인한 진압이 시작되었고,

시위현장 주변의 건물과 집을 뒤져 젊은 사람을 발견하면 발가벗겨 군 트럭에 실어갔습니다.


5월, 광주에 있었던 공수부대의 작전명은 ‘화려한 휴가’였습니다.

영화로도 제작되어 익숙하시죠?

광주로 오는 길에 버스에서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며

너무나 마음이 아팠는데, 실제와 다르지 않았음을…

영화가 미처 보여주지 못한 부분들도 너무나 많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금남로에서는 시민들의 끝없는 시위가 이루어졌고,

버스와 택시 기사들도 가세하여 계엄군에 저항했다고 합니다.

공수부대와 대치하던 중, 마침 애국가가 나오자

시민들이 전부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를 따라불렀는데

이때에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되었습니다.


애국가가 나오면 시민들은 모두 하던일을 멈추고, 따라 부르던 시기였습니다.

애국가가 울려퍼지던 때에 시민들을 향한 발포가 이루어졌었고,

총을 든 군인들이 있던 법정에서 죄수복을 입고서 애국가를 불렀고,

5월에 희생된 사람들의 시신을 옮기기 전에도 애국가가 불러졌습니다…

애국가에도 너무나 아픈 사연이 담겨져 있는 광주입니다.




최후까지 싸우자며 결산항전을 외치고 시민군이 지켰던 전남도청

계엄군의 잔인한 진압으로 목숨을 잃은 피해자들의 관을 모셨던 상무관은

보수공사로 인해 아쉽게도 밖에서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다음에 다시 한 번 찾아와 광주를 또 만나고 싶습니다.


5.18은 한 사람의 아픔이 아닙니다.

소중한 이를 잃은 가족의 아픔이요,  잔혹한 일을 함께 경험한광주 시민의 아픔이요,

어쩌면, 그 당시 광주를 진압하러 온 계엄군에게도 씻을 수 없는 고통의 아픔일 것입니다.


그 아픔을 치유하고,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밝혀

이 진실이 세계에 알려져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그것이 5.18 정신을 계승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주! 5.18 정신을 온전히 지켜가기 위해서는

희생자들, 피해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우리사회가 잘 보듬고 치유해주는 것이 전제입니다.

그분들을, 외롭게 홀로 싸우게 해서는 안됩니다.




철저하게 고립되고, 왜곡되었던 광주의 10일!

광주 시민들의 아름다운 저항의 10일이었던 5.18 민주화운동  

광주시민들이 보여준, 자발적인 참여와 나눔의 정신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시민군으로 참가하거나, 시위대에 결합하거나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에게 나눠주고,

부상자들을 위해 헌혈을 하고

체루탄 매운 연기를 없애기 이해 집집마다 물을 담은 양동이를 내놓고…

그 무섭고 두려웠을 상황에서도

가진것을 서로 나누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광주와 광주 시민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했던!

5.18민주화운동을 만들어 나간  모든 ‘시민’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

광주 답사에 함께하셨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친척이, 아는 사람이 광주에서 5.18을 겪었다는 이야기에

5.18 민주화운동이 먼 옛 이야기가 아닌 우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혼자서라도 오려고 했는데 함께 올 수 있어 좋았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간단하게나마 서로의 소감과 생각을 나눌 수 있어 더욱 의미있는 답사가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어렵고, 고통스럽고, 힘들고 아픈 역사를 들려주셨던 오월지기, 신호숙 선생님.

선생님의 이야기가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역사의 큰 흐름도 중요하지만, 역사를 만들어가고 그 역사를 구성하고 있는

한사람, 한사람.. 5.18을 온몸으로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셔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광주를, 5.18을 기억할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5월 답사에 함께해주신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때로는 함께 눈물을 흘리며, 직접 만든 주먹밥을 서로에게 먹여주며

기억에 남는 답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6월에도 함께해요~


-음식의 본고장! 남도에 와서 그냥 갈수는 없겠지요.

조금 이른 저녁으로 푸짐한 광주 한정식을 먹었습니다.

상한가득, 저 상차림 이후에도 몇가지가 더 나왔던….

푸짐한 저녁 밥상입니다.

저렴하고 맛있는 광주 한정식을 소개해준

광주KYC에도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 4월에 이어 5월에도 좋은 사진을 남겨주신 양승수, 조인숙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