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캠프 후기[한일 할머니를 짓누르는 전쟁의 기억]

By |2010-09-14T06:36:15+00:009월 14th, 2010|사무국과 탱고를|

1910년 8월 한일 강제병합. 그리고 100년이 흐른 2010년 8월.


한국과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인, 일본인, 재일조선인 그리고 애초 북한 국적을 가졌으나
지금은 한국국적을 갖게 된 탈북자. 이런 다양한 청년 50여명이 침략, 식민, 전쟁, 분단의 역사 현장(일본/한국)을 방문하고 전쟁피해자를 만나면서 ‘역사의 진실을 바로보고 동북아 평화의 미래를 함께 열자’는 뜻을 모아 7박 8일간의 [역사캠프]를 떠났다.

2010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지난 100년의 역사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역사캠프는 같은 역사를 조금 다르게 기억하는 한국과 일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여행이었다.

*행사 : 한중일 역사체험 캠프
*일정 : 8월 2일(월)~9일(월)/ 일본 도쿄, 한국 서울, 광주, 파주
*주최:KYC(한국청년연합)·동북아역사재단/NPO법인SayPeaceProject·KEY(재일코리안청년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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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1일 필리핀, 대만을 거쳐 18만 미군 병력이 오키나와에 상륙하면서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최대 격전지이자 최초로 일본 영토 내에서 벌어진 미군과 일본군의 전면전이었던 오키나와 전투. 약 83일동안 치러진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은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냈고, 일본측은 군인은 물론 일본 본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오키나와 주민들을 방패로 삼아 많은 주민들을 학살하기도 했던 비극적인 전투이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계란크기의 감자 2개와 소금국으로 버티며 ‘일본은 승리할 것이다’라는 믿음을 갖고 있던 16세 소녀. 그 소녀는 히메유리(ひめ히메는 공주, 유리ゆり는 백합을 의미)학도로 미군의 공격이 본격화되면서 부상병을 치료하고 돌보는 일본군 간호요원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오키나와는 자연동굴이 많아요. 그곳에서 일본군 책임자 소위 2명과 내가 부상병을 치료했는데 양손 없는 사람들에게 물도 떠먹여 주면서… 약도 없고 위생도 엉망이고…죽는 것을 기다릴 뿐….”

그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구출해주러 올 일본군 비행기를 기다리며 미군의 폭탄 공격이 멈춰 하루하루를 무사히 넘기는 것에 감사하며 지낸 날들이 이어졌다.


[히메유리 학도로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했던 가미에다 치요 할머니]

미군의 남하가 본격화되면서 수세에 몰리게 된 일본군부는 전군(軍)과 주민들에게 “잡히지 말라, 포로가 되지 말라. 포로가 된다면 그 자리에서 죽어라”라고 자결명령을 내리고 자결할 때 필요한 수류탄과 청산가리를 보급한다. 16세의 그 소녀는 수류탄을 구급가방 깊숙한 곳에 보관하며 자결할 날에 사용하려고 했다. 죽고 싶어도 어떻게 죽는지 방법을 몰라 수류탄 사용법을 소위에게 물어 연습을 하면서 말이다. 지상전이 전개된 3개월 동안 동굴 생활하며 밤에만 이동하게 되었는데 미군의 조명탄이 터져 밤이 낮처럼 환하게 밝아지면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시체들이 곳곳에 널부러져 있는 것을 보고 기겁하며 달렸다. 시체 위를 걷는 그 물컹거리며 아찔한 느낌. 그것이 그녀가 생각하는 전쟁이었다.


2010년 8월 3일. 도쿄대학교 홍고(붉은 정문) 근처 조그마한 강의실.

부드러운 백발을 가진, 허리가 약간 구부정한 81세의 가미에다 치요(上江田 千代) 할머니.
16세 때 일본군 히메유리 학도로 참전했던 자신의 경험을 일본인, 한국인 그리고 재일조선인, 탈북자들도 섞여 있는 조금은 특별했던 우리들(한중일 역사캠프 참가단)에게 증언해주셨다.

“도망가지 않아도 되는 것, 죽음에 두려움이 없는 것. 파란 하늘을 보며 걸을 수 있는 것. 총탄과 폭격이 없는 세상. 이것이 제가 너무나도 간절하게 원했던 것입니다”


전쟁이 멈춘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시절의 추악한 기억과 고통은 지금도 할머니의 어깨를 누르고 있다. 그 무거운 어깨가 언제쯤 가벼워질까? 과연 그렇게 될 수는 있겠는가? 국가가 저지른 추악한 전쟁에 동원된 일본인 할머니의 절절한 증언에 눈물이 났다. 그리고 떠오르는 얼굴 하나.

8월 6일 나눔의 집을 방문한 후에 우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박순희 할머니를 만났다.
19세의 나이로 원산에서 연행되어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녀의 언니도 강제 연행되어 위안소에 들어오게 된 기막힌 사연.
“원산에서 우리 집이 역앞에서 여관을 했는데.. 그렇게 가난하게 살지도 않았고.. 그런데 어떻게 한집에서 두명이나.. 나 한명이면 되는데.. 왜 두명이나..이렇게 못할짓을.. 우리아버지도 충격으로 돌아가시고…이런게 어딨어? 나는 너무 억울해..” 할머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눔의 집 역사관 방문]

서울에서 홀로 살고계신 할머니는 아직까지 수요집회에 한번도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 사람들도 자신이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고 했다. 우리에게도 ‘사진 찍어서 여기저기 올리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지금 87세가 되신 박순희 할머니는
“나는 내 삶이 너무 창피해. 정말 부끄러워 죽겠어. 부끄러워서..”라고 울부짖으셨다.

그리곤 더 이상 증언하시기를 중단하셨다.  ‘부끄러운’ 자신의 삶을 증언하신 날엔 60여년 전의 그 기억이 다시 떠올라 악몽에 시달리고 일본군인의 칼에 찔렸던 허벅지에서 다시 피가 난다고 했던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박순희 할머니……


[나눔의 집 역사관 방문/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시는 이옥선 할머니와의 대화]


50년이 넘도록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가슴속에 켜켜이 쌓아온 그 벗어날 수 없었던 고통의 시간. 그 외롭고 힘든 시간이 한일(韓日) 할머니들의 입을 통해서 역사의 진실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국가가 저지른 잘못된 전쟁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개인에게 고통을 전가 시킨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전쟁피해자 할머니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자 우리들은 자신들의 입장과 국적에 관계없이 ‘전쟁을 경험하지 않는 우리세대들이 할머니(전쟁피해자)들의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전쟁피해자들은 대부분 고령이고 건강상태가 좋지 못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기 전에…”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나누며 전쟁없는 세상, 평화로운 동북아시아 미래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구체적이고 분명한 평화의 실체. 그것이 잘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한일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2010년. 지금까지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역사의 무거움 앞에, 국가의 거대한 장벽 앞에서 한없이 초라하고 무기력해진 개인을 느끼며 한숨 쉬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오늘 이렇게 할머니 앞에서 눈물을 쏟았는데 내일 당장 아무렇치 않게 살아갈 내가 두려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국 학생이 눈물을 쏟으며 자기 고백을 했다. “혼자가 아니잖아. 우리가 같이 하자. 포기하지 말자” 일본 학생이 손을 잡아주며 함께 울었다.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구체적인 답은 알지못해도 아픈 역사, 불편한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하기 시작한 눈물이 눈물나게 아름다웠다.


[동북아시아 평화를 어떻게 만들것인가_워크숍+ 명동 어필액션 발표]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 것인가?
지난 100년의 역사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기억해야 하는가?
어떤 시대, 누구의 위치에서 기억하는지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한가지 변하지 말아야 할 것.
가해의 일본, 피해의 한국(조선)을 넘어서 제국주의 시대, 전쟁 피해자로서의 인간을 먼저 기억해야한다.
히메유리 학도단, 위안부 피해자가 아니라 ‘가미에다치요’ 그리고 ‘박순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기억하자.
야만의 시대, 국가의 추악한 전쟁에 동원되어 억압과 고통의 시간을 보낸 사람들(피해자들)의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기억하고 연대하는가에  따라서 동북아시아 사람들의 평화로운 미래는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희망을 가져본다.




[한중일 역사체험 캠프 폐막식 단체사진]

[P.S 이 글은 위클리 경향에도 기고된 글입니다]

우미정_KYC(한국청년연합)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