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길라잡이 정기답사_공주 ‘백제야 놀자’

By |2014-07-07T09:24:02+00:007월 7th, 2014|서울KYC 뉴스|

1년에 몇 번 없는 도성길라잡이에게는 특별한 다섯째주 일요일이 있는 6월!!
6월 28,29일에 공주로 1박 2일 전체 답사 “백제야 놀자!”를 잘~ 다녀왔습니다.

각 구간에서 시민안내가 끝나고 밥도 먹고 2차도 가지만 항상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도성길라잡이에게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맘껏 얘기하고 즐길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의 장일규 박사님의 안내로
공주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럼 지난주에 있었던 공주 답사가 어땠는지 살펴볼까요?! ㅎㅎ

무령왕릉 발굴과정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안타까운 현장이었습니다.
1971년 7월, 기자들과 수백명이 넘는 구경꾼의 아우성으로 인해 이뤄진 단 하룻밤만의 발굴!!
치밀한 조사계획과 모든 조사방법을 동원해 1년이든 2년이든 이뤄져할 발굴현장이
하룻밤만에 이뤄지다니…

왕의 금장식, 왕비의 베개, 은팔찌, 동거울 등 시간에 쫓겨 큰 유물만 대충 위치를 표시하고
나머지는 무덤 바닥에서 훑어내 꽃삽으로 쓸어 담아 국립공주박물관에 다시 복원한 현장이니…
이렇습니다! ㅠ.ㅠ


개망초가 아름답게 핀 이곳은 어디일까요?


바로 ‘고마나루터’입니다.
4대강 사업으로 지금은 넓은 모래사장이 없어져 예전 모습은 찾을 수 없습니다 ㅠ.ㅠ
원명샘께서 고마(=곰)나루 얘기를 해주셨는데 한 어부가 인근 연미산의 암곰에게 잡혀가
부부의 연을 맺어 두명의 자식까지 두었는데, 어부가 도망가자
그것을 비관한 암곰이 자식과 함께 금강에 빠져 죽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네요.

공주 송산리 고분군.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안내들었던 무령왕릉에 도착했습니다.

무령왕릉은 1971년 송산리 5호분, 6호분의 배수로 작업 중에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고분의 축조연대와 피장자가 분명하며 도굴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상태로
삼국시대 고분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고 하는데…
다시 생각해도 단 하룻밤만의 발굴은 안타까웠습니다.

송산리고분군을 배경으로 빠질 수 없는 단체사진!!

 “백제야 놀자!”의 하이라이트~!! 공산성에 도착했습니다.


‘진서루’는 4곳의 성문 중 서쪽에 설치한 문루였으나 유지만이 남아있었고
이후 성내로 진입하는 차도로 이용되다가 1993년도에 복원되었습니다.
‘공산지’에 의하면 문루의 규모는 동문과 같이 정면 3칸, 측면 1칸의 중층건물이었다고 합니다
공산성에 대한 안내를 열심히 듣고 있는 도성길라잡이들^^


공산성에 대한 설명은…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이때 갑자기 지인을 만나서 자리에 없었습니다 ^^;; ㅋㅋ)

공산성은 웅진백제시기(475-538년)를 대표하는 왕성으로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 성곽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인해 문주왕 원년(475)에 한성에서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을 거처 성왕(16년(538)에
사비(지금의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64년 간 왕성이었습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조선시대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리워졌습니다.
이 성은 금강에 접한 해발 110m의 산에 능선과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형 산성으로 축조되었는데,
백제시대에는 토성이었다가 조선시대 인조, 선조 이후에 석성으로 개축되었습니다.
현재는 동쪽의 735m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성입니다.

성의 길이는 총 2,660m이고 동서남북 네 곳에 문 터가 확인되었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었고 1993년에 동문과 서문을 복원하여 각각 영동루와 금서루로
명명하였습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 뿐만이 아리나 조선시대에는 감영을 비롯해 중군영 등
중요한 시설이 있었습니다. 현재 성내에는 추정 왕궁지를 비롯해 백제시대 임류각지, 연지와
통일 신라시대의 건물터, 그리고 조선시대 유적인 쌍수정, 영은사, 쌍수정 사적비, 만하루,
명국삼장비 등 많은 유적이 남아있습니다.

특히 2011년 10월에는 백제의 옻칠가죽칠갑옷을 비롯해 마갑과 화살촉, 철제 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는데 갑옷에 645년이라는 글씨가 남아있어 갑옷의 제작 및 사용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인 공산성 둘러보기~!!

‘진남루’는 공산성의 남문이며 토성이었던 공산성을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다시 쌓으면서 건립한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이었다고 합니다.

저멀리 다음 장소인 우금티 고개가 보이세요? 저너머에 있어요..

우금티고개에 있는 우금치(牛禁峙 : 소우 금할금  언덕치) 전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공주에서는 우금티로 부른다고 합니다.

우금치 전적지는 공주시 금학동,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길목인 견준산 기슭 우금치 일대로
제2차 동학농민전쟁의 최후 격전지입니다. 이곳에는 1973년 동학혁명군 위령탑 건립위원회에서
‘동학혁명군전적비’를 세워 당시를 기리고 있습니다만 실제 격전지는 우금티고개 방면이 아닐까
추정된다고 합니다.

‘동학혁명군전적비’ 앞뒤에는 이렇게 이름을 지운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누구의 이름일까요?

숙소로 돌아와서, 장일규 교수님과 오늘 다녀온 곳들을 짚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역시 복습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어진 조별 토론 시간 ..  
[대한항공 송현동 부지 호텔 건립 추진과 역사문화경관 보존, 학습권 보장에 대한
우리의 생각 그리고 행동]이란 주제로 3팀으로 나눠 토론과 발표가 있었습니다.
토론시간이 정말 짧게 느껴질도록 각 팀마다 열띤 토론을 했고 팀장이 발표를 했는데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시민안내 때 개발과 보존에 대해 어떻게 안내를 하면 좋을지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저녁식사와 경매행사 ‘도더비’를 진행하였는데…
첫 경매치고는 물품과 수익금이 짭짭하다는..!!
안타깝게 피해자(?)들도 속속 드러났습니다.
여기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ㅋㅋㅋ

그리고 새벽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이야기…
다음날 출근 걱정없이, 막차 걱정없이 그동안 못 했던 이야기를
새벽을 친구삼아 계속 되었습니다~~ ㅎㅎ

그리고 다음날 아침, 도성길라잡이 정기답사에는 한치의 틈도 안줍니다.
다들 이렇게 바닥에 엎드러 롤링페이퍼를 진행했습니다.
오랜만에 한다는 분도 계셨고…처음 한다는 분도 계셨답니다.
그리고 몇몇 분들의 롤링페이퍼 내용 소개까지 (훈훈한 내용들만…)ㅎㅎㅎ

다시 버스를 타고 마곡사로 향했습니다. 첫번째 만났던 명부전입니다.

명부전은 지장전, 혹은 시왕전이라고 부르고
지장보살과 염라대왕을 비롯한 시왕을 모신곳으로 1939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지상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 열반 후 미륵이 세상에 오실때까지의 무불시대에 육도 중생을
교화하겠다는 큰 서원을 세운 보살입니다. 다른 보살상은 화관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지장보살만은 승려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겠다는 대원력의 보살입니다. 왼손에 든 쇠지팡이로 지옥문을 두드려 열고,
오른손의 구슬로는 어두운 세상을 광명으로 비추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시왕은 죽은 자의 영혼이 도달하는 명계를 다스리고 죽은 자의 죄업을 심판하는 열 명의 왕입니다.
사후세계를 다스리는 염라왕이 중국에 들어와서 도교적인 영향을 받아서 시와사상이 전개되었고,
특히 대당의 ‘불설예수시왕생칠경’에서 지장보살과 시왕이 결합하여
종래의 현세이익적인 신앙에서 내세구원적인 신앙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경전에 따르면 중생들은 죽은 날로부터 7일 단위의 7번과 100일, 1년, 3년 등
열 번에 거쳐 시왕에 의해 선, 악업을 심판받고
그 결과에 따라 육도 가운데 한 곳에 태어난다고 합니다.

특히 명부전 주변의 가을 단풍은 천하일경이라 할 만하며, 명부전의 공포가 만들어낸 부처님의
형상은 마치 지장보살을 증명하는 듯합니다. 업장을 소멸하고자 하는 분들의 좋은 기도처입니다.

오층석탑 조성시기는 원나라 간섭기였던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탑의 전체적인 형상은 평면의 폭이 좁은 반면 탑신의 높이가 높아 세장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고려시대 전형적인 석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탑의 전체 높이는 8.76 미터이고, 상륜부에 청동제의 풍마동이 올려져 있는데
이것은 원나라 말기 라마불교의 영향을 받은 양식이라 전합니다.
이러한 양식의 탑은 현재 한국, 인도, 중국 등 세계에 3개 밖에 존재하지 않는 귀중한 탑이기도
합니다. 현재 보물 제79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국보로 승격하여 지정하도록 추진하고 있습니다.

대광보전은 해탈문과 천왕문으르 지나 북원으로 진입하면 오층석탑 뒤 위치합니다.
17세기 중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충청우도 공주판지 서령 태화산 마곡사 대광보전 중창기’에
따르면 1782년 대화재로 소실된 후 제봉당 체규를 중심으로 재건이 시작되어 1785년 완공되었다고
전합니다. 3단의 자연석 기단 위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축물입니다.
대광보전 불상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는 지권인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불로 진리를 상징하는
부처님입니다. 

오른쪽 손가락 끝으로 왼쪽 손가락 끝을 덮어 누르고 있는 독특한 손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대웅보전은 보물 제801호로 1785년에서 1788년에 걸쳐 중수되었고 지붕의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해
바깥쪽에 세운 기둥인 할주가 특징입니다. 대웅보전 불단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서방의 아미타 부처님과 오른쪽에 동방의 약사여래 부처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대웅보전 앞에서 바라본 마곡사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 답사였습니다.

우리 도성길라잡이 선생님과 사무국 선생님 그리고 장일규 박사님 감사합니다~!!^0^

* 본 후기는 도성길라잡이 이혜선 선생님의 글입니다.
* 사진은 양승수, 조인숙 선생님께서 제공해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