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경성서울 600년 역사도시를 걷는다 시민강좌
셋째주에는, 성균관대 이신철 선생님과 함께 실내강의와 답사를 진행했습니다.
1. 실내강의3 10월 14일(화)
일제강점기, 해방 공간의 “정치1번지 북촌”
지금은 북촌하면 한옥마을이 떠오르지만
일제강점기와 해방 시기 북촌은 정치1번지였다고 할 수 있을만큼
‘정치경제’ 전반에 영향력있는 여러 사람들이 이곳에 살며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청계천의 북쪽이어서 북촌이라 불렀던 이곳.
조선시대에는 양반들이 살았고,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는 정치 활동의 주무대였습니다.
일제강점기 3.1운동과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중앙고.
근대 교과서를 처음으로 만든 교육자, 초기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동아일보를 만든 창립자인
김성수 자택을 비롯하여 송진우 집터도 이곳에 있습니다. 친일논란이 여전히 진행중에 있습니다.
또한 여운형 선생이 건국동맹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준비했던 장소 역시 북촌입니다.
해방이후 한반도는 여러개의 정치노선이 연합하기도, 충돌하기도 하면서
‘나라만들기’에 집중하던 시기였습니다.
우익, 중도, 좌파 등등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모든 세력이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잡기위해
북촌에서 다양한 모임, 연설회 등을 합니다.
어지러운 근현대사의 중요한 무대가 이곳 북촌이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북촌을 중심으로 활발한 정치 활동이 이루어졌고,
북촌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시기까지의 과정들을
전체적으로 쭉 훑어주신 덕분에 많은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2. 현장답사3 10월 18일(토)
지난 실내강의의 내용을 현장에서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이신철 선생님과 함께 가을이 깊어가는 10월 원서공원에서 시작된 답사.
이곳 원서공원을 비롯해서 현대 사옥이 들어선 곳은 휘문중학교터라고 합니다.
휘문중학교는 해방 후 정치집회 1호가 개최된 곳으로,
건국준비위원장인 여운형 선생은 이 자리에서 독립을 쟁취하고,
건국에 나서자고 열변을 토했다고 합니다.
김성수와 함께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쳐나간 송진우.
여운형 중심의 건준에 맞서기 위해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국민대회준비회의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한민당(한국민주당) 수석총무가 되어
우익인사들을 규합해나갔으나 1945년 12월에 암살당했습니다.
‘최초의 한국인 서양화가’이며, 한국의 동양화가인 고희동 자택
1915년 김성수가 인수하고 송진우, 현상윤, 최두선 등을 교사로 초빙. 중앙고등학교앞.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앞장선 학교의 중심이었다고 합니다.
여운형 선생의 계동 자택 표지석.
이 집은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우승 당시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가 폐간될 때
신문사에서 제공한 것으로 1947년 암살 때까지 거주했다고 합니다.
1987년 현대본사가 들어서면서 집 뒤쪽이 반 이상 잘렸고,
이후 도로 개설로 앞쪽이 헐렸고 현재는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대동세무고등학교에서 보이는 김성수 자택
일제강점기부터 보존된 한국전통가옥으로.
만해 한용운 선생이 머물면서 불교잡지 유심을 발간했습니다.
이외 계동 주변 골목으로, 을사늑약 체결당시 끝까지 거부하며 면직당한 한규설 집터는
여러개의 음식점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박헌영의 재건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자들의 통합대회인 “계동 열성자 대회”가
열린 곳도 이곳입니다.
헌법재판소가 들어서기 전 이 자리는 창덕여고 교사였으며, 해방 당시에는 경기여고 교정.
경기여고가 정동으로 옮겨가고 창덕여고가 위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여기 재동의 경기여고 강당에서 1945년 9월 6일~8일까지
전국인민대표자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ㅁ군 상륙 이전에 민족의 자주적인 정부를 수립하자는 의미로, 전국의 인민대표들이 모여
인민대표자회의를 열고, 정부 수립을 내외에 천명하였으나 미국의 불인정으로 유야무야되었습니다.
조선인민당(45.11.12)과 근로인민당(47.5.24) 창당대회가 열렸던 천도교 중앙대교당입니다.
원서공원에서 시작해서, 원서동, 계동, 재동 등
‘한국근현대 정치일번지’를 주제로 한 북촌 답사는 좀 특별했습니다.
조선시대와 한옥에 대한 이미지가 강했던 북촌이었지만,
아주 중요한 역사의 공간을 새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도시의 변화와 개발로 인해, 역사의 흔적이 점점 지워지고 있는 것이 아쉽습니다.
정치1번지 ‘북촌’을 새롭게 해석하고
어떻게 기억하고 보존해 갈지 고민이 남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시민 여러분 고맙습니다.